(소설) 청춘 스케치 5

by 도라지

청소 시간이 끝남과 동시에 마지막 수업 시작을 알리는 예비종 소리를 들으며, 재일이랑 교실을 향해 뛰어가면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 어제 진짜 잘 생긴 남자애 만났다~"


재일이가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나를 잡아 세운다.


"어디서? 어떻게~? 어느 학교? 혹시 대학생 오빠는 아니지? 니가 남자애라고 했으니까.."


"야, 시간 없어. 이따 저녁 시간에 도시락 싸들고 털보네 떡볶이로 나와~ 그럼 다 얘기해 줄게. 떡볶이만 먹으면 배 고프니까, 꼭 도시락도 가지고 와~"


재일이가 궁금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먼저 교실로 들어갔다. 아마 저녁 시간까지 남은 한 시간 수업 동안, 재일이는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을 거다. 남자 친구라면 재일이가 나보다 훨씬 능력자다. 능력자이기에 더 궁금한 법이다. 억지로 떠밀리듯 교실로 들어가는 재일이의 뒷모습을 보는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서은, 뭐가 그렇게 재밌어? 빨리 교실로 들어가~"


영어를 가르치시는 학생부장 선생님의 음성에, 나는 재빨리 복도 저 끝쪽에 있는 우리 교실로 뛰어들어갔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재일이가 도시락 가방을 들고 아예 우리 교실 앞에 서있었다. 우리는 도시락 가방 하나씩 들고 후문을 통과해서 털보네 떡볶이집으로 들어갔다. 벌써 몇 군데 테이블에 체육복 차림의 애들이 앉아 있었다.


털보네 주인 오빠는 얼굴에 털이 하나도 없다. 고딩 남자애들보다 코밑과 턱 주변도 잔털 하나 없이 매끈하다. 삼 년 동안 그 집을 드나들며 주인 오빠랑 친해지면서, 왜 간판 이름이 털보네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주인 오빠는 여기 사장님이 털보 할아버지라서 털보네라고만 대답했다.


여고생들은 그 집 진짜 사장님이 털보 할아버지든 꽃미남 오빠든 상관없었다. 맛있는 떡볶이를 푸짐하게 주면 그만이었다. 가끔 도시락을 싸들고 가서, 테이블에 둘러앉은 여고생들 머릿수보다 떡볶이를 적게 주문하고, 거기서 도시락을 꺼내놓고 같이 먹어도 핀잔만 주지 않는다면, 그걸로 우리는 충분했다. 가끔 친절한 주인 오빠는 다른 테이블에 손님이 없을 때면, 라면사리를 서비스로 주기까지 했으니, 간판 제목 따위 아무 상관없었다.


그래도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우리가 3학년이 되기 전 겨울부터 털보네를 둘러싼 희한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주인 오빠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소문이었다. 트랜스젠더다, 아니다 아직 트랜스 전이다, 어떤 남자랑 애인 사이라더라 하는 온갖 소문들이 여고생들 사이에 무성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 시절 그런 소문에 우리는 무척 예민하게 반응하고 흥미롭게 관찰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날엔 재일이는 학교 야자를 삼십 분 일찍 마치고, 동산교회 옆에서 털보네 가게를 염탐한 적도 있었다. 학생들 야자 시간보다 삼십 분 전쯤 털보네 떡볶이 집은 문을 닫곤 했다. 털보네 오빠가 가게 문을 닫고 셔터를 내릴 때쯤이면, 사방은 이미 어둑어둑해져서 대상을 상세하게 분간할 수가 없을 때다. 그래도 재일이는 마치 매우 적나라하게 본 듯이, 그날에 관한 이야기를 내 앞에서만 비밀스럽게 털어놓았다. 어떤 키가 크고 건장하게 생긴 남자가 털보네 오빠의 어깨에 손을 얹고, 둘이서 다정한 연인처럼 동산교회 골목길로 사라졌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털보네 오빠는 충청도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는다. 나의 예리한 촉으로는, 그 오빠는 서울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가끔 내가 털보네 오빠처럼 새침한 표정과 말투를 쓰면, 사람들이 나더러 서울서 왔느냐고 묻곤 했다. 재일이는 나의 추측에 맞장구를 치며, 내가 지어내는 털보네 오빠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감탄 어린 눈빛으로 경청하곤 했다.


그날은 떡볶이 2인분을 당당하게 주문했다. 떡볶이가 나오기도 전에 테이블 위로 도시락을 먼저 올려놓았다. 털보네 오빠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 마디 했다.


"신김치 통만 올려놓지 마~ 니들만 왔다 가면, 반찬 냄새가 가게 안에 너무 배어서 말이야."


우리는 알았다는 듯 오빠를 향해 눈을 찡긋할 뿐이다. 그런 우리를 귀엽다는 듯이 오빠가 착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도시락 뚜껑을 열기도 전에 재일이가 물었다.


"그래서, 누구냐고?"


"응, 어제 그리스 조각상 같은 남자애? 너두 알지, 우리 반에 맹학교 언니 한 명이 지난주부터 와서 공부하는 거~"


"그럼, 알지~ 그 언니 지팡이 짚고 다니잖아. 그래도 조금 보이긴 하는 거니?"


"응, 아주 조금 볼 수가 있어서, 민아 언니는 점자책도 읽지만, 우리 책도 같이 읽어. 요즘 선생님들 칠판 글씨 엄청 크게 쓰시잖아. 큭큭"


"그래서? 그 언니가 왜?"


"민아 언니네 학교에 어제 저녁에 갔었거든. 거기서 조각상 남자애를 본 거야. 맹학교 학생 아니고, 그냥 우리처럼 눈이 보이는 애, 민아 언니 공부를 도와주러 오고 있대~"


내가 재일에게 준영이를 설명하는데, 나도 모르게 준영이의 학교 자퇴 얘기는 덧붙이고 싶지가 않았다.


(2021년 10월 5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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