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음성에는 진지함이 묻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사과하셨으니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요, 앞으로는 안 그러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성질 고약한 사람이라도 만나면, 소란스러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거 같거든요."
괜찮다고 대답은 하면서 남자에게 경고까지 주는 당돌한 여고생 앞에서, 순간 남자가 멈칫 놀라는 것처럼 보였다. 복도 쪽에서 수정이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교실로 들어서면서 수정이가 벽에 있는 스위치를 켰다. 교실 안이 환해졌다. 내 앞에 서있던 남자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붉게 느껴졌다.
"어, 기승 오빠도 와 있었네요~ 오빠, 혹시 내 친구 얼굴 또 만진 건 아니지?"
수정이의 질문에, 내 앞에 서 있던 남자의 두 눈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듯이 맴돌고 있었다.
"아니야, 수정아, 그냥 잠깐 얘기만 했어~"
내가 수정이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남자를 스치듯 지나가며, 내가 조용히 그에게 말했다.
"앞으론 손 조심하시는 게 좋겠어요~"
남자의 귀가 벌게지는 걸 보는데, 조금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위해서도 분명 필요한 충고였다. 수정이가 기승 오빠라고 부르던 남자가 지팡이를 짚어가며 책상 하나를 찾아서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민아 언니가 들어와서 자리에 앉았다.
"준영아, 너도 들어와~ 왜 안 들어오고 거기 서있니?"
민아 언니가 복도 쪽을 향해서 말했다. 그러자 키가 큰 남학생 한 명이 우리가 앉아있는 교실을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여기는 내 공부를 도와주는 이준영 선생님~ 수정이랑은 같은 교회 다녀서 알 거고, 서은이랑은 처음 보는 사이지?"
와, 진짜 잘 생긴 남자가 나타났다. 그리스 조각상처럼 콧날이 오뚝한 남학생이 안경을 쓰고 멋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는 수정이랑 같은 교회 다니면서 알게 됐어. 수정이랑 같은 반 친구면, 나랑 동갑이네. 나는 이준영이라고 해.. 킁 킁"
어, 그리스 조각상이 비염이 있나 보다. 말끝마다 킁킁거리는 모습마저 귀여웠다.
"응, 반가워, 나는 이서은~앞으로 잘 지내보자."
옆에 앉아있던 민아 언니가 말했다.
"준영이는 지난주부터 수학을 가르쳐주고 있어. 수정이가 그러는데, 서은이가 영어를 잘한다면서, 서은아, 언니 영어 공부 좀 도와줄 수 있겠니? 수정이는 국어를 도와주기로 했거든~"
나는 속으로 뛸 듯이 기뻤지만, 짐짓 점잖은 어투로 대답했다.
"제가 뭐 실력이 썩 훌륭한 건 아니지만, 아는 대로 열심히 도와드릴게요~"
민아 언니가 나와 준영이에게 기승 오빠를 소개했다.
"이 친구는 박 기승, 너희들보다 두 살 위니까, 형이나 오빠로 부르면 되겠네~기승이도 나랑 함께 입시 준비하기로 했어. 여기선 내가 제일 어른 노릇하게 생겼는걸. 흐흐~"
박기승이란 남자는 겨우 나보다 두 살 위였다. 아까 그 남자가 내 얼굴에 손을 댔을 때는, 언뜻 보기에 나보다 대여섯 살은 많은 어른인 줄 알았다. 불빛 아래서 찬찬히 살펴봐도 준영이 못지않게 수려한 이목구비다. 다만 허공을 향해 있는 텅 빈 눈동자가 묘하게 슬플 뿐이었다. 우리 가운데 가장 윗사람답게 민아 언니는, 어느 요일에 어떤 과목을 정해서 공부할 건가에 대한 논의를 하자고 했다.
'아차, 그 생각을 못했네.. 과목별로 요일이 달라지면, 준영이를 못 보게 되는 거잖아?'
나는 그럴 수는 없을 거 같았다. 민아 언니랑은 우리 학교에서도 매일 보지만, 준영이가 공부 선생하는 날이 아니면 준영이는 영영 볼 수가 없는 게 아닌가. 나는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막내다. 준영이를 따라 교회를 갈 수도 없다. 어떻게든 이 난관을 극복해야만 했다.
"언니, 그러지 말고, 하루에 세 과목을 다 함께 공부하는 건 어떨까요? 저도 수학이 약해서, 공부가 필요했거든요."
적극적으로 치고 나오는 나를 보며, 수정이가 거들었다.
"요일별로 혼자 와서 공부 도우미 하는 것보다, 하루에 세 과목 다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서로 다른 과목 공부까지 할 수 있으니까, 각자 공부에도 도움이 될 거 같아요. 기승 오빠도 괜찮죠?"
의견이 쉽게 통일되었다. 매주 수요일 저녁 6시에 우리는 공부를 함께 하기로 했다. 과목별로 50분씩, 서로 부족한 공부를 가르치면서 배우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민아 언니와 기승 오빠의 세 과목 선생님이 되었다.
(2021년 10월 2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