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청춘 스케치 1

by 도라지

그 해 여름이 시작될 무렵, 우리는 여고 3학년이었다.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한다지만, 우리에게 오월과 유월은 잔디밭에 나가서 점심 먹기 딱 좋은 달을 의미했다. 유난히 먹성이 좋았던 나는 학교에 도시락을 세 개씩 싸가지고 다닌 날도 많았다.


야자라도 쨀 계획을 가진 날에는 도시락은 두 개로 줄었겠지만, 도시락 세 개 정도는 들고 학교 가는 버스를 탔던 날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책은 학교 사물함에 넣어 놓고, 도시락이나 체육복 등만 가방에 넣고 다닌 여학생이 바로 나였다. 어머니가 고생 많으셨겠지만, 다행히 내가 막내라서 우리 집에서 도시락을 싸는 학생은 그 당시엔 나 하나뿐이었다.


학생이 책가방에 도시락만 많이 넣고 다닌다고, 내가 불량하거나 다른 친구들을 괴롭히거나 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밥만 많이 먹을 뿐, 사고 치거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만한 일을 하는 건 별로 내켜하지 않는 학생이었다.


나를 그저 착실한 모범생으로만 보신 학생부장 선생님께서, 학생회 선도부장이란 완장을 채워 주셨다. 덩치가 아주 좋거나 성량이 거칠게 풍부하거나 카리스마가 남달랐던 것도 아니었다. 조용히 학교생활하겠다고 고집부리는 나를 학생부장 선생님은 학생회에 꼭 끼워 넣고 싶으셨나 보다.


오월이었던 것 같다. 그날도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자마자, 도시락을 챙겨 들고 친구들 몇이서 도서관 앞 잔디밭으로 몰려 나갔다. 우리가 다니던 여학교는 미션 스쿨이었다. 다른 고등학교에는 없는, 붉은색 벽돌의 도서관 건물도 따로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도서관 앞에는 그리 작지 않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잔디밭 옆으로는 이제 막 덩굴장미가 피어나고 있었다.


잔디밭 점심 패거리에는 청주에서 이름만 대면 아는 부잣집 막내딸이 있었다. 그녀의 도시락은 유명했다. 집에서 살림을 거들어주는 아주머니가 음식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형형색색의 신선한 과일은 따로 준비해서 보내곤 하셨다. 그 맛있는 도시락을 은정이는 가끔 맛이 없다고 먹지 않을 때가 있었다. 철없이 반찬 투정을 부려도, 때로는 다른 친구들에게 살갑지 않게 굴어도, 나는 그런 은정이가 싫지 않았다.


도시락을 먹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행복한 시간은 늘 짧게 느껴진다. 잔디밭에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으면, 어느새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곤 했다. 하루 중에 그 종소리가 제일 듣기 싫었다.


빈 도시락을 챙겨서 교실로 들어서는데, 맨 앞자리에 못 보던 얼굴이 한 명 앉아 있었다. 두꺼운 안경이 뱅글뱅글 돌아서, 안경 너머 속에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모두 자리에 앉자 선생님께서 들어오셔서 그녀 소개를 했다.


"이 학생은 우리 학교 옆 맹학교 학생인데, 여러분들처럼 대학 입시 준비 중이라서 몇 달간 우리랑 함께 공부할 예정입니다. 여러분들보다는 언니니까, 여러분은 언니라고 부르면 될 거 같습니다. 자, 신민아 학생, 나와서 인사해 볼까요?"


지팡이를 짚고 칠판 앞 탁자 쪽으로 나온 신민아 언니는, 매우 희미하게나마 쪼금은 볼 수 있다고 자신의 시력 상태를 설명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채플 시간은 마땅치 않았지만, 미션스쿨에서만 누릴 수 있는 유연하고 자유로운 세계관은, 단연 최고의 교육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당시 교장 선생님의 인품과 교육관은 월등했고 훌륭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민아 언니의 첫인사가 끝나고 자리에 앉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수정이가 민아 학생 등하굣길 잘 챙겨주고, 혹시라도 불편 사항 같은 거 있으면 선생님한테 즉각 말해주고, 수고 좀 해주길 바란다~"


수정이는 나와 비밀 일기장을 함께 쓰고 있는 친구였다. 내가 그 일기장에 나의 말들을 기록한 뒤 수정이의 사물함에 넣어놓으면, 수정이가 자기의 이야기를 쓰고 내 사물함에 넣어놓는 순환 방식이었다. 우리는 비밀 일기장으로도 모자라, 우표를 붙인 편지를 우체통에 넣어 보내기도 했다.


수정이는 장차 신학과 진학을 꿈꾸는 학생이었다.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과 진학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알려주고 싶은 소망이 간절했던 것 같다. 그래서 맹인학교에 가서도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민아 언니가 오고 며칠 후, 수정이가 수업이 끝날 때쯤 내게 물었다.


"서은아, 오늘 야자 시간에 민아 언니네 학교에 같이 가지 않을래?"

나는 이유도 묻지 않고 그러자고 대답을 했다. 민아 언니랑 동행하는 활동이니, 선생님께 말씀드릴 때도 야자 빼는 구실이 당당하게 생긴 셈이었다.


(2021년 10월 1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