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에 대장을 110cm나 잘라내는 험한 수술을 받고 나서, 아버지는 수술 후 두어 달은 좋아하던 막걸리도 드시지 않았다. 대장암 수술 후 다른 데로 전이가 없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미 전립선에서도 암은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구십이 된 아버지의 전립선은 따로 수술이 필요가 없다고 저명한 의사는 말했다.
꾸준히 전립선 암 치료제를 복용하면서도 아버지는 다시 막걸리를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앞으로 더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먹고 싶은 막걸리 한잔마저 포기해야 할 만큼 남은 인생이 그렇게 길지는 않을 거라고 아버지는 판단한 듯 보였다. 나는 소주만 드시지 말라고 당부할 뿐, 부모님 댁에 일주일에 두 병씩 막걸리를 재워 놓는다.
그렇게 막걸리와 약을 병행하는 아버지의 야윈 허리에서 벨트가 두 번 가까이 회전해도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걸음을 옮기던 아버지가, 요즘 들어 "얼마 못 살 것 같다."는 말씀을 몇 차례 하셨다. 아버지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오면 내 마음은 자꾸만 오그라들었다. 그래도 맛나게 드시던 것들은 여전히 잘 들고 계시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아직 그 나이에 도달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다.
부모님이 식사 외에 자주 드시는 필수 간식에는 우유와 요구르트, 그리고 호박엿 등이 있다. 특히나 어머니가 좋아하는 호박엿을 판매하던 동네 식자재 마트가 폐업을 하면서 호박엿 구매에 비상이 걸렸다. 부모님 댁에 쟁여 두었던 호박엿은 이제 반 봉지가 겨우 남았을 뿐이다. 초조해진 나는 그 호박엿을 찾아서 몇 군데 가게를 돌아다녔으나 모두 허탕이었다.
온라인에서는 같은 질량의 동일한 회사 제품이 오프라인 마트 가격보다 훨씬 더 높은 가격으로 거래가 되고 있었다. 나는 선뜻 구매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꼼꼼하게 비교해 보다가 그중에 가장 저렴한 판매자의 제품을 구매했다. 이제 한 달은 너끈히 버틸 것을 기대하며 안도의 숨을 쉬고 있을 때, 호박엿 판매자로부터 한 통의 문자가 날아왔다. 상품이 품절되었다는 안내 문자였다.
순간 의심스러운 촉이 발동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는 대기업 식품 회사는 아니지만 전통이 있는 꽤 유명한 회사였다. 하지만 요즘처럼 시장경제가 위축된 시대에 그 회사라고 건재하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회사는 남아 있어도, 그 제품의 생산은 정지될 수도 있음이다. 별의별 추측에 내 마음은 다시 초조해졌다. 다시 대형마트 사이트로 직접 들어가 보았다. 없다. 그럼 마지막으로 다른 마트~ 있다.
밖에는 가을비가 여름 장맛비처럼 퍼붓고 있었다. 몇 시간 전에 부모님 집 근처에서 바삐 걸음을 옮기다가 나는 그만 어이없게도 빗길에 미끄러져서 넘어지고 말았다. 허리와 어깨 부분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다. 오늘 안으로 저 마트에 있는 물건을 구매해야 할 것 같은 본능에 마음이 조급해져서, 밖에 나가있는 남편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기막힌 우연이라니~ 남편은 그 마트와 지척에 있는 서비스센터에서 엔진오일 교체 중이라고 하였다.
반드시 오늘 안으로 구매하라는 마누라의 지령을 받고 마트로 달려간 남편에게서 호박엿 "다섯 봉지"가 매대에 남아있다는 연락이 왔다. "싹 쓸어 담으라"는 마누라의 주문을 받으며, 남편이 이렇게 물었다. "한 봉지 뜯어서 먹어도 돼?" 일각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대답했다. "안 돼요."
영상 통화가 아니라서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남편의 목소리 너머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벌써 남편은 호박엿 한 봉지를 뜯었음이 틀림없었다. 나는 카톡에 이렇게 적어서 남편에게 보냈다. <한 봉지 개봉했으면, 나머지 네 봉지만 갖다 드리세요.>
내일 부모님 집에 가져다 드려도 되지만, 한시라도 빨리 부모님 찬장에 호박엿을 쟁여 놓으면 부모님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호박엿을 봉투에 담아 든 남편이 부모님 댁 초인종을 누르고 현관문을 쾅 쾅 두드려도 아무 대답이 없었나 보다. 남편이 놀라서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남편의 전화를 받고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아니, 이 양반들이 돌아가셨나? 비가 와서 나가지도 못할 텐데, 왜 전화도 안 받으실까?'
한국전쟁 때 받은 고문으로 트라우마가 있는 아버지는 지금도 현관문의 고리까지 걸어서 문을 잠근다. 현관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어도, 안에서 고리를 걸어버리면 부모님 댁의 현관문은 열리지 않는다. 나는 그제야 부모님 댁 현관문의 고리가 가지고 있는 난감함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았다. 두 분이 함께 돌아가실 확률은 매우 낮겠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고리를 걸어 잠그는 아버지의 습관을 바꿀 필요성은 충분했다.
현관문 밖에서 낙심해 있던 남편이 맥없이 뒤돌아 나오는데, 백발의 어머니가 아파트 베란다에 기대어 서서 돌아가는 사위를 불러 세웠다. "누구여, 00 아범여?" 고작 오후 6시가 되었을 뿐인데, 일찌감치 저녁을 드시고 자리에 눕는 부모님은 잠결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인터폰으로 확인하고도, 낯선 사내가 두드리는 걸로 알고 놀라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일 낮에 가져다 드릴 걸, 괜히 남편에게 급하게 가져다 드리라고 말한 나의 실수였다. 두 양반이 놀라서 밤잠이나 제대로 주무실지 나는 또 그게 걱정이 되었다. 잠에서 깬 아버지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00 아범이 호박엿 5 봉지 가지고 왔어~" 그게 얼마나 어렵게 구한 건지 알 리가 없는 아버지가 자다 말고 호박엿을 하나 입에 물고 말씀하셨다.
아까 남편은 내게 판매대에 다섯 봉지 밖에 없다고 했었다. 이상하다, 한 봉지 뜯었으면 부모님 댁에는 4 봉지가 가야 하는데 어찌 된 걸까, 나는 궁금해서 다시 남편과 통화를 했다. "마트에 6 봉지 있었어, 나도 먹어봐야 물건을 알 수 있을 거 같아서 한 봉지 내가 먹으려고 뜯었지." 남편이 호박엿을 우물거리며 아까 매장 직원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덧붙였다. "매장 직원한테 물어보니까 그 마트에 남은 재고가 그게 다라네. 이제 그 물건 안 들어온대, 회사가 생산을 안 하려는 건가~~(우물우물)?"
"마트에도 더 이상 그 제품이 들어오지 않는다는데 그걸 한 봉지 뜯어서 먹고 싶으냐"라고 나는 남편에게 핀잔을 줄 수가 없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그 회사가 생산을 중단한다면 다른 회사 제품을 사면 될 일이다. 호박엿 한 봉지 사위가 먹어보겠다는데, 어머니도 한 봉지 못 먹는 상황을 이해하실 게다.
하여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어리숙했던 남편의 수법이 일취월장이다. 마누라에게 미리 "다섯 봉지"라고 공표하고 한 봉지를 뜯어먹는 기술이라니~ 내가 남편 수발을 기막히게 잘 들었나 보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