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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밤 Feb 10. 2023

돌봄에는 휴일이 없다 2

세 명의 개, 아홉 명의 고양이와의 짧은 동거가 시작됐다.


  주어진 임무는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동거동물들을 돌보는 일. 그런데 거주동물의 수가 조금 많았다. 이곳은 마이크로 생추어리(micro-sanctuary: 개인이 운영하는 동물 보호소)이기 때문이다. 개 세 명과(인간 중심적이며 위계적인 수사인 '마리'를 지양하여 모든 동물에게 '명'이라는 수사를 사용) 고양이 아홉 명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총 12명의 타자와 공존하며 돌봄을 제공하게 되었다.


  세 명의 개와 아홉 명의 고양이를 잘 돌보기 위해서는 어떤 일들이 필요할까? 첫날의 돌봄은 예고도 없이 눈을 뜨자마자 시작되었다.


  번쩍!


  첫째, 털 관리다.

  사실 이건 거주동물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보통 함께 머무는 인간동물을 위한 조치다. 눈송이처럼 바닥과 허공에 굴러다니며 온갖 가구의 색을 약간씩 희끄무레하게 만드는 털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우선 교실에 있던 호흡기관 모형들이 생각나며 우려가 되기 시작한다. 개가 허리와 머리를 힘차게 돌리며 파드드드드득 털 때 야외에선 웃어도 실내에선 오히려 초조해지는 것이다. 왠지 눈이 가려운 것 같고 기침이 잦아 불안 게이지가 어느 정도 찼다면 엉덩이를 들어 우선 창문을 연다. 그리고 기다란 막대 걸레대를 비장하게 꺼내 마른걸레로 2번, 젖은 걸레로 2번 왕복하면 최소한 털이 아닌 바닥 위에 딛고 서 있는 기분이 든다.


  둘째, 식사 관리.

  나는 모든 거주동물을  평소에 얼마만큼의 양을, 얼마나 자주 먹는지  길이 없었다. 그래서 항시 밥그릇이 비지 않도록만 신경 썼다. 다행히 그들은 나와 달라 아무도 '있는 만큼 ' 먹지 않고 허기가  때만 신중히 먹는 듯했다. 하긴 나도 평생의 끼니가  종류의 사료라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음식만 먹을까. 기분이 좋지 않거나 긴장 상태에 있을 때는 아예 음식을 입에 대지 않기도 했다. 염려가 되는 순간들이 있었으나 다행히 비지 않는 밥그릇은 없어 수월하게 완수했다.


  셋째, 오줌과  리다.

  고양이 화장실은  다섯 군데가 있었다. 고양이의 오줌을 흡수하는  두부 모래 속에서 응고된 고양이 오줌과 똥을 찾아내어 변기로 내려야 했다. 삽으로 모래를 뒤적이며 크고 작은 화이트초콜릿을 캐내는 일은 꽤나 재미있었다.  운동도 되었고, 통이 묵직해짐에 따른 성취감도 있어서 고양이 돌봄에서의 최애 일정이었다. 개들의 경우에는 산책하다가 누는 똥을 주섬주섬 봉지에 담아 묶어 집에 돌아가 버리면 됐다. 봉지를 묶거나    참기도 잊지 않아야 했다.


  넷째, 크고 작은 일들.

  그저 외면하고   멀리 바라보고 싶은 일들이  카테고리에 포함되겠다. 침대 매트리스에 오줌 누기, 담요에 오줌 누기, 방바닥에........ 이에 더해, 다투는 거주동물들도 가끔 있어서 끼어들어 중재하였지만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내지는 못하였고 그냥 공간을 분리했다. 어서 종간 언어 번역기가 발명되었으면..


하다 보면 저녁이 된다. 밥을 챙겨 먹고 자기 돌봄을 잠시 하면 의아스럽게도 하루가 나버린다. 하루를 온전히 타자를 위해 소모한 것이다.

 

소등을 하면서도 도대체 이해가  됐다. 원래 이런 건가? 이걸 계속할  있을까?  하루도 마음 놓아   없는, 휴일 없는 돌봄을?


하지만 신비롭게도 하루가 다르게 그건 빠르게 몸의 일부가 됐다.


외출하고 들어와서 시간을 돌린  바닥에 널린 털을 보면 어찌나 멍해지던지. 청소의 흔적을 찾아볼  없이 원상 복귀되어 있어 놀라고 실망스러운 마음이 든다면, 돌봄의 어쩔  없는 '반복' '지난함' 성격을 다시금 상기하자.  지난함 덕분에 잔머리를 잔뜩 굴려 효율적인 방법을 찾는다. 떨어질 털을 빗질로 미리 떼어 놓은  청소를 하는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1 빗질, 2 막대걸레 -  코스를 뿌듯하게 완주하게 된다. 반복되기에 실력이 늘고 요령이 생긴다.


손가락이 하나  자라는 것처럼, 돌봄의 루틴이  몸의 일부가 되어갔다. 큰 고민을 동반하지 않고 ‘척척’ 해내는 일이 늘어난다.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지침 또한 분명히 몸 어딘가에서 누적되었지만 그조차도 잊는 순간이 많았다.



그래서 돌봄 노동은,

잠을 자려고 누울 때 생각의 시발점이 되는 것.

그렇지만 멈추지 않는 생각에도 자게 하는 것.

멀어져야 그 크기를 알게 되는 것.

반복할수록 응축되다가 몸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


돌봄은 결국,   없는 몸의 일부가 된다.  

손가락으로, 발가락으로.

 

고오작 일 주일이었으면서 동거가 끝난 후 12시간을 숙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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