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기만 해도 몸에 전율이 돋고 심장이 뛰는 대상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일까? 개인적인 친분이 없음에도, 시대를 다르게 태어났음에도 감동스러운 존재들이 있다. 나만 그러한지 다른 이들도 그러한지는 물은 적이 없어 모르겠다.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외침이 크든 작든, 본인에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찾은 해답을 외치는 사람들. 그들은 평생 나의 동경의 대상이어 왔다.
초등학생 때 이런 질문을 받아 상상해본 적, 다들 있지 않은가. “내가 일제강점기 당시의 사람이었다면, 독립 투쟁을 했을까?”, “내가 한국 7, 80년대 당시의 사람이었다면, 민주화 운동에 발 벗고 나섰을까?”……. 질문 앞에 섰을 때 나는 그 당시로 넘어가 선택길을 앞둔 사람이 되었다.
가족들이 위험하니 가지 말라며 말렸다. 나도 어제 나갔다가 오늘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저 멀리에서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치는, 내가 동경하는 민중들의 소리가 들렸다. 문지방에 걸쳐 서서 고민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돌아갈 때마다, 대문 기둥을 잡고 고개를 숙일 때마다 결론이 바뀌었다. “함께 투쟁에 참여하겠”다며, 또는 “가족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결국 어떤 결정을 내리며 살고 죽었을까? 마치 환생을 한 듯 이 고민은 현재의 삶 속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고함치는 사람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했다.
내가 태어나 살아가는 현시대에도 여러 삶들이 기존의 시스템에 대항하여 목소리를 낸다. 이건 아니라고, 보지 못하던 것에 눈을 뜨자고. 이 뜨거운 마음들은 당연하지 않은 일들에만 따라붙는다. 어떤 시대에는 가장 크고 논쟁적인 이슈가 되었을 흑인 노예제 정책 철폐를 위해 투쟁할 필요는 이제 없다. 외치던 그들의 목소리가 확산되어 정치가 되었고, 이어 일반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생에서도 문지방을 박차고 나가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내일만큼은, 내일만큼은 그런 사람이고 싶다.
전방에 서는 사람이 된다면, 나는 비로소 나를 동경할 수 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