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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밤 Jan 20. 2023

5. 언제나 페미니스트

 엄마는 내게 코르셋을 넘겨주지 않았다. 일부러 노력했던 것 같기도 하고 스스로조차 코르셋을 널널이 풀어놓은 여자였던 것도 같되 확실한 건 현상뿐이다. 페미니즘 리부트가 일어 기존의 '여성성'을 깨고 탈피하는 운동인 '탈'코르셋 또는 '탈'코가 물결처럼 흘러 나에게 당도해 왔을 때 엥, 벗어던질 코르셋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요즘 유행어인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가 생각나 위트를 더하자면... 그냥 살았는데요, 코르셋이 없었습니다.



 자를 머리도(이미 숏컷) 지울 화장도(원래 잘 안 함) 버릴 치마도(월경 때 통치마 입으면 무지 편한 거 아세요?) 없어 아무것도 안 했다.


외모만 보고 남자 기숙사로 안내받았던, 경기 상대팀에게 "남자가 왜 여자 축구 경기에서 뛰냐"며 항의를 받던, 쇼핑센터에서 "아드님이 참 잘생기셨네요, "라는 말을 속으로 웃으며 듣던 여자애는 제자리에 있었지만 시대가 변하며 다르게 읽혔다. 새로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코르셋에서 적극적으로 탈피한 한 페미니스트 여성으로 읽었다. 그래서 막상 페미니즘을 생각해 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던 나에게 사람들은 내게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했다. 공부하지 않았지만 페미니스트라는 오해를 통해 '수다로 쉽게 듣는 페미니즘' 강좌를 구독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흥미롭고 상처 나고 끓어오르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 나는 나를 페미니스트로 정의한 적이 없어.

타이밍을 봐 가며 에둘러 손사래를 쳤지만 그들과의 만남은 대화는 손가락 사이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여성성에 갇히지 않으려고 경계하고 계산하며 행동하는 어른된 지금보다, 어느 성별인지 알 수 없었고 성별의 경계에서 모두를 혼란스럽게 교란을 일삼으며 산 때가 더 페미니즘을 온몸으로 주창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서 페미니스트가 아닌 적이 없다는 생각까지 도달했다.



"혹시... 페미... 뭐 그런 거예요?"

직장에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고들 한다. 나는 파리지옥처럼 끈적이게 웃으며 그런 질문을 기다리고 있다.

"I've always been.(항상 그래왔습니다만.)"

이상 또 상상하며 자아도취하는 mbti 'N'이었습니다.




학부생 시절, 아이들을 가르치던 곳에서 같이 일하는 선배와 의견이 엇갈렸다.

대토론의 주제는 '아이들에게 성차별을 알려주어야 하는가?'였다. 깜깜한 퇴근길에 오르막길을 걸었는데, 대화의 흐름에 따라 걸음의 완급이 함께 바뀌었다.


선배: 알려준 후에 그걸 깨도록 해야 해.


나: 알게 되는 순간부터 더 성별을 의식하며 살게 될 거야.


선배: 정확히 알지 않으면 깨지도 못 해.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으로 보도록 교육해야 그런 것을 접했을 때 '이게 뭐지..?'하지 않고 '아, 성차별이다.'라고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고 시스템을 전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


나: 아이들(초등학생)이 지금 알아봤자 유리천장을 깰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차라리 성별 상관없이 동등하게 살다가 사회에 나가서 동등하지 못한 취급을 받았을 때, 그런 제도에 대해서 더 분노하고 저항할 힘이 강하다고 봐. 어렸을 때부터 사회에서 여자는 남자보다 연봉이 적다는 말을 들어오면 '원래 그렇다고 했으니까'가 되어버릴 수도 있잖아.


선배: 그럼 넌 어땠는데?


나: 나도 거의 모르며 살았어. 알려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거겠지?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언니한테 이런 말을 하더라고. '여자는 취직이 더 어려우니까 과를 보고 선택하기보다는 유명한 대학에 가'라고. 나는 그때 처음 알았어. 남자와 여자가 크게 다르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나는 정말 깜짝 놀랐고 배신감이 들었지.






집 앞 미용실엔 핑크 텍스가 있다. 같은 기장에 같은 커트 스타일을 요구해도, 글쎄 말이야 여자가 여자이므로 3000원 비싸다. 보이콧하고 싶지만 핑크 텍스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잘 없다. 기장에 따라 가격을 매기는 곳이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신년 기념 이발하러 일주일 전에 여길 가서 핑크 텍스에 순응하며 3000원 더 냈다고 부끄럽게 공개 고백하며 글을 매듭짓는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럼에도 언제나 페미니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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