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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May 05. 2023

13> 江南曲(강남곡) / 강남의 노래

漢詩 工夫(한시 공부)

江南曲(강남곡) / 강남의 노래

- 鄭夢周(정몽주) -


江南女兒花揷頭

○○●○○●◎

(강남여아화삽두) / 강남의 아가씨는 머리에 꽃을 꽂고


笑呼伴侶游芳洲

●○●●○○◎

(소호반려유방주) / 웃으며 벗들 불러내어 방주에서 노니네.


蕩槳歸來日欲暮

●●○○●●●

(탕장귀래일욕모) / 노를 저어 돌아올 때 해가 막 지려는데


鴛鴦雙飛無限愁

○●○○○○◎

(원앙쌍비무한수) / 원앙새만 쌍으로 나니 무한이 시름겹네.



이 시는 강남 아가씨가 벗들과 자유분방하게 노니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칠언절구(七言絶句)이다. 평측(平仄)이 신체시(新體詩)의 시격(詩格)에 맞지 않고 악부시(樂府詩)에 속한다 하겠다. 악부(樂府)라는 말은 본래 한(漢) 나라 때 무제(武帝)가 음악을 관장하기 위해 설립한 관서(官署)를 가리켰으나, 뒤에 와서 민간 가요 즉 민가(民歌)의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민가(民歌)를 채집하고 연주한 데서 연유한다. 즉 한대에는 이들 민간 가요를 가시(歌詩)라고 불렀으나 육조(六朝)에 이르러 악부라고 하였다. 한편 많은 문인들이 이들 민가를 모방하여 시를 지었기 때문에 중요한 시체(詩體)의 하나가 되었다. 압운(押韻)은 ◎표시된 두(頭), 주(洲), 수(愁)이고 우운목(尤韻目)이다.

악부시(樂府詩)는 대체로 임을 연모하는 감정이나 원망하는 감정, 그리고 변방에서의 수심(愁心) 등을 제재로 삼고 있는데, 이러한 감정은 시적(詩的) 화자(話者) 즉 시인의 것이 아니라 대리된 감정을 표현한 것이 많다. 이 시 역시 강남의 아가씨가 머리에 꽃을 꽂고 벗들과 방주에서 노닐다 해 질 녘에 배를 타고 돌아오는데 쌍쌍이 나는 원앙새를 보고 작자인 포은(圃隱)의 외로운 처지를 대리해서 읊고 있다. 본디 한(漢)의 악부시(樂府詩)는 고정된 장법(章法), 구법(句法) 등이 없으며, 길고 짧음도 마음대로였다. 4언의 시경체(詩經體)를 답습한 것도 없지는 않으나, 절대다수는 새로이 출현한 신체시라고 할 수 있다. 1자, 2자로부터 8자, 9자, 10자 등으로 구(句)를 형성하고 있는 잡언체(雜言體)가 있는가 하면, 5언체도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형식을 빌어서 사상(思想), 정감(情感) 등을 표현함으로써 형식적인 구속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었다.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정포은(鄭圃隱)의 강남곡(江南曲) 시는 호탕한 풍류가 천고에 빛을 내며, 이 시는 악부시와 몹시 비슷하다(圃隱詩, 風流豪宕 輝映千古 而詩亦酷似樂府)”고 했다.


시어(詩語)를 살펴보면, 江南(강남)은 중국의 양자강 남쪽으로, 따뜻하고 호화로운 곳을 표상하며, 작자의 상상 속을 지명으로 보아야 함. 揷(삽)은 꽂거나 끼우는 것으로 삽입(揷入)이다. 芳洲(방주)는 방초(芳草)가 많이 피어 있는 작은 모래섬을 말한다. 蕩(탕)은 방탕하거나 움직이는 걸 나타내고, 넓고 큰 것, 씻는 것, 용서, 유혹, 흐르는 것, 늪 등 뜻이 다양하다. 槳(장)은 배를 젓는 노를 말한다. 강남곡(江南曲)은 여러 시인들이 노래한 수많은 작품이 있다. 그중에서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의 작품을 포은의 작품과 비교해 보자.

人言江南樂(인언강남락) / 남들은 강남의 즐거움을 말하지만

我見江南愁(아견강남수) / 나는 강남의 근심을 본다네.

年年沙浦口(연년사포구) / 해마다 모래 포구에서

腸斷望歸舟(장단망귀주) / 애타게 돌아오는 배를 바라보네.


★ 정몽주(鄭夢周, 1337~1392) : 경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고려 인종·의종 때 추밀원지주사를 지낸 정습명의 후손이지만, 이후 조상은 한직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 중의 어느 날 꿈에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리고는 놀라서 잠이 깬 뒤 그를 낳았다 하여 어렸을 적 이름은 몽란(夢蘭)이었다. 그러다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검은 용이 동산 가운데 있는 배나무에 올라간 것을 보고 깨어 나가 보니 배나무에 몽란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몽룡(夢龍)이라고 고쳤다가 성년이 된 후 몽주(夢周)로 다시 고쳤단다. 과거의 삼장(초장·중장·종장)에서 연이어 장원을 차지하여 이름을 떨치고, 당대 최고의 학자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정도전 등과 수학했다. 1362년 예문관의 검열로 관직에 첫발을 내디뎠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367년 성균관 박사, 1375년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성균관 박사로 유교 경전을 강의하던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밖에 없었는데, 정몽주의 강의를 듣던 사람들 가운데 그의 유창한 해석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들어온 경전이 정몽주의 강의 내용과 일치하자, 사람들이 그의 높은 학식에 탄복했다는 일화가 <고려사>에 전한다.


숙적(宿敵) 정몽주와 이방원의 만남은 <하여가(何如歌)>·<단심가(丹心歌)>라는 시조와 함께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학문과 정치, 외교에 탁월했던 정몽주는 이방원의 손에 죽었으나, 도리어 이방원에 의해 전설이 된다. 이방원은 조영규 등을 보내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습격하여 죽였다. 이때 정몽주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정몽주가 죽은 뒤 13년이 지난 1405년, 이방원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追贈)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追封)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새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조선에도 정몽주 같은 충신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정몽주의 충절은 선죽교에 뿌린 피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전설로 남았고, 그의 학문과 이념은 조선의 사림파에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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