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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May 06. 2023

14> 題僧舍(제승사) / 스님의 거처를 짓다.

漢詩 工夫(한시 공부)

題僧舍(제승사) / 스님의 거처 짓다.

- 李崇仁(이숭인) -


山北山南細路分

○●○○●●◎

(산북산남세로분) / 산 뒤쪽 산 앞쪽 오솔길이 갈려 있고


松花含雨落繽紛

○○○●●○◎

(송화함우락빈분) / 비 머금은 송화 꽃은 어지러이 떨어지네.


道人汲井歸茅舍

●○●●○○●

(도인급정귀모사) / 스님이 샘물 길어 띳집으로 돌아가니


一帶靑烟染白雲

●●○○●●◎

(일대청연염백운) / 한 줄기 푸른 연기 흰 구름을 물들이네.



이 시는 고려 말에 이숭인(李崇仁)이 지은 한시로 산속에 사는 스님의 거처를 보고 지은 칠언절구(七言絶句) 시이다. 기구(起句)의 2번 자인 북(北) 자가 측성(仄聲)이라서 측기식(仄起式)으로 압운(押韻)은 ◎를 한 분(分), 분(紛), 운(雲)으로 문운목(文韻目)이다. 측기식(仄起式) 정격(正格)을 비교적 잘 지키면서, 기구(起句)의 1번 자인 산(山), 승구(承句)의 3번 자인 함(含), 전구(轉句)의 1번 자인 도(道)의 평측(平仄)을 변화를 주었다. 이사부동(二四不同)·이륙대(二六對)·오칠부동(五七不同) 도 잘 지켜졌다. 이 시는 이색(李穡)이 발문(跋文)을 지은 작자의 문집인 『도은문집(陶隱文集)』 권 3을 비롯하여, 『청구풍아(靑丘風雅)』·『기아(箕雅)』·『대동시선(大東詩選)』 등의 시선집(詩選集)과 『해동역사(海東繹史)』에도 실려 있다. 참고로 『도은문집(陶隱文集)』의 발문은 저자의 생존시기에 고려의 이색(李穡)·정도전(鄭道傳), 명(明)나라 장보(張溥)·고손지(高巽志)·주탁(周倬) 등 많은 학자들이 썼다.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제목(題目)이 ‘승사(僧舍)’로 축약(縮約)되어 있으며, 『성수시화(惺叟詩話)』·『호곡시화(壺谷詩話)』에는 ‘빈분(繽紛)’이 ‘분분(紛紛)’으로 실려져 있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목은(牧隱)이 이 시를 보고 당풍(唐風)에 가깝다고 평한 덕에 명성이 마침내 이루어졌다(牧隱見之 以爲逼唐 聲名遂成).”라고 기술하고 있다. 『지봉유설(芝峯類說)』에도 ‘분분(紛紛)’으로 되어 있으며, ‘급정(汲井)’이 ‘급수(汲水)’로 되어 있다.


이 시는 간결, 전아(典雅)한 이숭인 시의 진면목을 잘 드러내 보인 작품으로, 「신설(新雪)」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한 폭의 동양화를 보게 하는 듯이 말로써 그림을 그린 시편이다. 특히 결구(結句)가 묘사의 빼어난 솜씨를 보인 가구(佳句)다. 16세기 문장가 최립(崔岦)은 “목은(牧隱)의 문(文)과 도은(陶隱)의 시(詩)는 우리 동방의 으뜸”이라 평했다. 그림 이야기에 덧 붙여 한마디 더하자. 북송(北宋)의 황제 휘종(徽宗 : 1082-1135)은 서원(書院)과 화원(畫員)의 제도와 운영을 정비하는 등 문예부흥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본인도 시서화(詩書畵)에 능통했고, 특히 화조(花鳥)를 잘 그렸는데 궁정(宮廷) 서화가를 선발하는 시험에 종종 직접 문제를 제출하기도 했다. 한 번은 「난산장고사(亂山藏古寺)」를 화제(畫題)로 내놓았다. 제목의 뜻은 기암괴석의 험난(險難)한 산에 감춰진 오래된 사찰을 그리라는 거다. 응시 화가들은 저마다 첩첩 산봉우리와 깊은 계곡을 그린 뒤에, 어떤 이는 절의 지붕만 그리고, 다른 이는 첨탑(尖塔)의 꼭대기, 또 다른 이는 부도탑(浮屠塔)을 그렸다. 그런데 장원(壯元)으로 뽑힌 화가의 작품에는 막상 절이 없었다. 대신에 깊은 계곡 폭포의 용소(龍沼)에서 물을 길어 물지게에 지고, 비탈길을 따라 돌아가는 스님이 있을 뿐이었다. 출제자 휘종(徽宗)이 요구한 진정한 감추기의 ‘장藏’은 바로 그런 은유(隱喩)의 미(美)이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 문인화가인 가재(稼齋) 김창업(金昌業 : 1658-1721)이 그린 「괴암산사도(怪巖山寺圖)」에 그런 비슷한 정경(情景)이 나온다. 개울가의 좁고 꾸불꾸불한 길에 물동이 어깨에 지고 가는 스님이 있고, 절은 저 멀리 산꼭대기 바위 사이에 살짝 숨어있다.

유성(兪成)의 『형설총설(螢雪叢說)』에도 이런 이야기가 보인다. 한 번은 “꽃 밟으며 돌아가니 말발굽에 향내 나네(踏花歸去馬蹄香).”라는 화제(畵題)가 주어졌다. 말발굽에서 나는 꽃향기를 그림으로 그리라는 주문이다. 모두 손대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을 때, 한 화가(畫家)가 그림을 그려 제출하였다. 달리는 말의 꽁무니를 따라 나비 떼가 뒤쫓아 가는 그림이었다. 말발굽에 향기가 나므로 나비는 꽃인 줄 오인하여 말의 꽁무니를 따라간 그림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시(詩)와 화(畵)는 서로 깊은 연관을 가졌다. 옛말에 ‘시는 소리 있는 그림이요(有聲之畵), 그림은 소리 없는 시(無聲之詩)’라 하였다. 특히 한시(漢詩)는 경물(景物)의 묘사를 통한 정의(情意)의 포착을 중시하는데, 이는 마치 화가가 화폭 위에 경물(景物)을 그리면서 그 속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표현하는 것과 같다. 경물은 객관적 물상(物像)에 지나지 않는데, 여기에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얹을 수 있는가. 화가는 말을 할 수 없으므로 경물이 대신 말하게 해야 한다. 이를 ‘사의전신(寫意傳神)’이라 한다. 말 그대로 경물을 통해 ‘뜻을 묘사하고 정신을 전달’ 해야 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 방법은 ‘입상진의(立象盡意)’니, 상세한 설명 대신 형상(形像)을 세워 이를 통해 뜻을 전달하는 것이다.


★ 이숭인(李崇仁 : 1347 ~ 1392) :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문신·학자이다.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자는 자안(子安)이고, 호는 도은(陶隱)이다. 본관은 성주(星州)로서, 성산군 이원구(李元具)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숙옹부승이 되고, 그 뒤 장흥고사 겸 진덕박사에 임명되었다. 명나라 과거에 응시할 문사를 뽑을 때 1등 하였으나, 25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내지 않았다. 예의산랑·예문응교·문하사인을 지내고, 공민왕이 성균관을 연 뒤 정몽주(鄭夢周)·김구용(金九容)·박의중(朴宜中) 등과 함께 학관(學官)을 겸하였다. 우왕 때 전리총랑이 되어 정도전·김구용 등과 함께 북원(北元)의 사신을 돌려보내자고 주장하여 유배되기도 하였다. 해배되어 성균사성(成均司成)을 거쳐 우사의 대부가 되어 동료들과 함께 소(疏)를 올려 국가의 시급한 대책을 논하였다. 그 뒤 밀직제학이 되어 정당문학 정몽주와 함께 실록을 편수 하였다. 창왕 때 예문관 제학으로서 박천상(朴天祥)·하륜(河崙) 등과 더불어 영흥군 왕환(王環)의 진위를 밝혀 무고에 연좌되어 헌사가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여 피해 다니다가 시중 이성계의 도움으로 다시 경연에서 시강(侍講)하게 되었다. 후에 다시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는데, 권근(權近)이 무죄를 주장하는 소를 올렸으나 간관의 무고로 우봉현으로 이배 되었다. 공양왕 때 간관이 다시 논죄하여 이배 되었고, 뒤에 이초(彛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색·권근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풀려나 지밀직사사·동지춘추관사가 되었으나, 정몽주의 당이라 하여 다시 삭직 당하고 유배되었다.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조선건국 후 정도전이 보낸 심복 황거정(黃居正)에 의해 유배지에서 살해되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시문으로 이름을 날려 이색이 중국에서도 드문 문장가라고 칭찬하였다. 원과의 복잡한 국제관계에서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고, 명 태조도 그가 지은 표(表)를 보고 찬탄하였으며 중국의 사대부들도 그의 저술을 보고 탄복하였다고 한다. 저서로 『도은시집(陶隱詩集)』 5권이 있다. 『도은시집』 서문에 의하면, 『관광집(觀光集)』·『봉사록(奉使錄)』·『도은재음고(陶隱齋吟藁)』 등을 지었다고 하나, 현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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