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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易⽔送別(역수송별) / 역수의 송별

금삿갓의 漢詩工夫(250815)

by 금삿갓

易⽔送別(역수송별) / 역수의 송별

- 駱賓王(난빈왕)


此地別燕丹

차지별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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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연나라 태자 단과 헤어질 때


壯⼠髮衝冠

장사발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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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의 머리칼은 관을 뚫었지


昔時⼈已沒

석시인이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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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은 이미 없지만


今⽇⽔猶寒

금일수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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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강물은 오히려 차구나.

此地(차지)는 易⽔之上也(역수지상야)이라. 荊軻(형가)가 ⻄刺秦王(서자진왕)할새 燕太⼦丹(연태자단)이 送⾄易⽔上⽽軻(송지역수상이가)가 別之(별지)라. 荊軻(형가)가 急太⼦之難(급태자지난)하야. 怒髮(노발)이 激髮⽽上衝冠也(격발이상충관야)라. 昔時(석시)에 易⽔上(역수상)에 燕丹(연단)과 ⾼漸離及⽩⾐冠客(고점이급백의관객)이 送軻者(송가자)가 皆慷慨垂淚(개강개수루)러니, 今(금)에 安在哉(안재재)오.

이곳은 역수의 물가다. 형가가 서쪽으로 진왕을 찌르러 갈 때, 연나라 태자 단이 역수 가에 이르러 형가를 송별하였다. 형가는 태자의 어려움을 급히 여겨 성난 머리털이 관을 뚫고 위로 솟아 나왔다. 옛날에 역수 물가에 연나라 태자 단과 고점리와 흰옷에 갓 쓴 나그네가 형가를 보내는 것이 모두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렸었는데, 지금은 이들이 모두 어디에 있는가?


今⽇(금일)에 復于此(부우차)에 送別(송별)하니, ⾵蕭蕭兮易⽔寒(풍소소혜역수한)이 猶如昔⽇也(유여석일야)라. 賓王(빈왕)이 盖有慕于荊軻⽽爲之感慨如此(개유모우형가이위지감개여차)이라.

◯ 易⽔之上(역수지상)에 送別⼈情(송별인정)이 追憶荊卿之當年(추억형경지당년)하야 因感今⽇之怊悵(인감금일지초창)하니, 讀之(독지)에 令⼈悲傷(영인비상)이로다.

오늘날 다시 여기에서 송별하니, 바람이 쓸쓸하고 역수물이 찬 것이 마치 옛날과 같았다. 낙빈왕이 형가를 숭상하고 사모함이 있어서 감개가 이와 같이 되었다.

◯ 역수 가에 송별하는 인정이 형가의 그때를 추억하고, 오늘날의 슬픈 감정에 연유하여 이를 읽음에 사람으로 하여금 슬프고 아프게 하는구나.

* 易⽔(역수) : 허베이성에 있는 강 이름.

* 燕丹(연단) : 연(燕) 나라의 태자 단(丹)을 줄여서 씀.

* 荊軻(형가) : 진시황을 살해하려던 자객 이름.

* 怒髮(노발) : 화가 나서 머릿털이 서는 것.

* ⾼漸離(고점리) : 형가의 친구이며 악기 축(筑)의 명연주가임. 형가의 실패 후에 본인도 암살 시도를 하지만 실패하고 처형됨.

* 駱賓王(낙빈왕 ; 626/640?〜684?) : 중국 당(唐) 초기의 시인(詩⼈)으로 <초당사걸(初唐四傑) : 왕방(王勃)·노조린(盧照隣)·낙빈왕(駱賓王)·양형(陽炯)>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무주(婺州) 의조(義烏) 출신으로 성품은 호방하고 거만하면서도 강직하여 일찍부터 으레 도박꾼들과도 놀곤 하였다고 한다. 고종(⾼宗) 말년에 장안주부(⻑安主簿)가 되었는데, 당시 고종의 황후로 실권을 휘두르던 측천무후(則天武后)를 공격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가 절강의 임해승(臨海丞)으로 좌천되자 출세에 뜻을 잃고 관직을 떠나버렸다. 그러던 684년 이경업(李敬業)이 측천무후 타도를 외치며 거병하자 그의 부속(府属)으로서 이경업의 거병을 옹호하고 동시에 측천무후를 공격하며 그 죄를 천하에 전하여 알린다는 취지의 격문(檄文)을 기초하였는데, 측천무후는 이 격문을 읽던 중 「(무덤을 덮은) 한 줌 흙도 마르지 않았는데 여섯 자밖에 안 되는 고아는 어디에 의지할 것이냐〈一抔土未乾(일부토미건), 六尺孤安在(육척고안재)〉」라는 구절에서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면서 격문을 지은 자의 이름을 물었고, 낙빈왕의 이름을 듣자 「이런 인재를 불우하게 내버려 두었으니 이는 재상의 잘못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경업의 거병은 실패로 끝났고, 이후 낙빈왕은 도망쳐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잡혀 죽었다는 설도 있다). 전당(錢塘)의 영은사(靈隱寺)에 숨어 살았다는 전설도 있는데, 절을 소재로 한 시도 전해지고 있다. 낙빈왕은 이미 일곱 살 때부터 시 짓는 재주가 뛰어났으며, 자라서는 오언율시(五言律詩)의 묘리를 터득하였다고 한다. 그가 지은 「제경편(帝京篇)」은 고금을 통틀어 절창(絶唱)으로 평가된다. 으레 몇 자의 글자만 가지고 대구(對句)를 지어 「산박사(算博士)」라는 속칭도 있었다. 낙빈왕의 글을 몹시 아꼈던 측천무후는 조(詔)를 내려서 그의 문장 수백 편을 모아 교운경(郄雲卿)에게 명하여 편찬할 것을 명했는데, 이것이 《낙빈집(駱丞集)》(전4권이라고도 하고 10권이라고도 한다)으로 송(頌)・부(賦)・오칠언고(五七言古)・오율(五律)・배율(排律)・절구(絶句)・칠언절구(七言絶句)・계(啓)・서(書)・서(叙)・잡저(雑著)의 총 11항목으로 분류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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