燕國公(연국공) 장열이 벗 허국공(許國公) 蘇頲(소정)과 함께 촉으로부터 돌아오는데, 길에서 서로 약속을 하고 동쪽 도읍에 같이 들어가자 했는데, 공이 일이 있어 시기를 놓치니 이 사람이 먼저 돌아간 까닭으로 시를 보낸 것이다. 나그네가 되어 빨리 돌아가고 싶어 비록 하루 먼저 돌아갔지만 역시 기쁘게 여긴다. 이 때문에 당신과 기약을 수정하여 손을 잡고 같이 낙양에 들어가려 했는데, 생각지 못하게 가을바람이 당신의 편의를 쫓아 나를 기다리지 않고, 낙양에 이미 먼저 들어갔으니, 내가 약속에 늦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燕國公(연국공) 張說(장열)의 자는 ‘道濟(도제)’이니 낙양 사람이다. 현종을 도와 허국공(許國公) 蘇頲(소정)과 더불어 문장가로서 함께 이름 있어 짧은 기간에 조정의 사령장을 지어내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燕許大手筆(연허대수필)’이라 불렀다.
* 張說(장열, 667-730) : 당나라 대신. 자(字)는 도제(道濟) 또는 열지(說之). 낙양 사람, 무측천시는 대책으로 을등(乙等)을 얻고, 태자교서를 수여받았다. 중종 때 황문시랑(黄门侍郎) 등을 지냈다. 예종 때 중서 문하평장사(平章事)에 들어가 예종에게 태자(太子)를 세우라고 권했다. 현종 때 중서령으로 연국공(燕國公)에 봉해졌다. 문사에 능하여 조정에 중요한 문서는 그의 손으로 작성한 게 많았다. 소정(蘇颋) 즉 허국공(許國公)과 조정의 많은 문서를 지어내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燕許大手筆(연허대수필)’이라 불렀다. 악양으로 좌천되었을 때의 작품으로, 비교적 특색이 있다. 《장연공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