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자)’자 전에 먼저 한 층의 경황이 있었는데, 임이 한 번 떠나간 뒤로부터는 오히려 문득 (벼 짜는 일을) 그만둔 것이다. 임이 아직 나가지 아니하였을 때에는 낮에 부지런히 베를 짜서 늘 달밤에 낮 동안 다 짜지 못한 남은 베틀을 손질했었는데, 지금은 다시 할 수가 없다. 아마도 그리운 임 생각이 간절하여 마음의 실마리를 잃고, 여인의 솜씨를 부릴 마음도 사라졌다.
윗 구절이 바로 思(사)자를 위해 이끌어 지은고로, 思君(사군) 두 자를 바로 이었다. 如(여) 자는 아래 일곱 자에 모자를 씌워, 임이 가는 곳에 충분히 이르렀고, 곧 보름달도 넉넉히 이른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나, 달은 차면 반드시 이지러지고, 사람의 시름은 반드시 야위어지게 한다. 달은 이미 차서 하룻밤 하룻밤에 그 맑은 빛이 점점 줄어드니, 곧 첩의 맑은 빛을 비춰 보인 것이다. 날마다 점점 소멸되지만 첩의 임 생각이 끝내 마치는 날은 없으니, 맑은 빛이 점점 사라짐으로 인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규방의 정으로 신하가 임금을 그리워하는 것을 비유하니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다.
* 張九齡(장구령 , 678-740) : 당나라 대신. 자는 자수(子壽), 다른 이름은 박물(博物). 소주 취장(韶州 曲江, 현재 광둥성 사오관韶關) 사람이다. 경룡(당 중종 연호, 707-710) 초년 진사. 당 현종 때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중서령을 역임하여 당나라에서 유명한 현상(賢相)이다. 장구령은 재치가 민첩하고, 문장이 우아하며, 시적인 의미가 뛰어난 성당 초기의 중요한 시인으로, 그의 오언 고시는 당시(唐詩) 발전에서 매우 높은 지위와 큰 영향을 미쳤다. 장구령의 대표작으로는 《감우(感遇)》 12편, 《잡시(雜詩)》 5편 등이 있으며, 예를 들어 《망월회원(望月懷遠)》, 《여숙회양정구호(旅宿淮阳亭口号)》 등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명작들이다. 또한 '곡강집' 20권이 전해진다. 장구령이 당시 전개한 문학 활동은 개원시단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구령은 담력과 식견, 선견지명이 있으며, 충직한 직책을 다하고 직언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절대 권세에 빌붙지 않고 악의 세력과 싸울 용기가 있어 당대의 번영에 큰 기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