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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결혼에 얽힌 옛이야기

by 금삿갓

현대의 결혼은 종교·인종·문화와는 특별관계가 점차 없어져 간다. 대부분의 결혼 풍습은 조상들의 토속적인 관습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규격화되고 표준화되어서 비슷한 형태로 다듬어지고 있는 것 같다. 오랜 옛날의 결혼은 신부를 훔쳐다가 결혼하는 것이 결혼의 가장 오래된 형태일 것이다. 열렬한 신랑이 이웃 부족의 신부를 훔쳐 도망친 다음 여자의 가족과 친구들이 화를 누그러질 때까지 후세를 낳고 숨어 살았다. 따라서 최초의 밀월여행은 그렇게 아기자기한 것이 못되었다. 그것은 납치되어 온 신부와 신부의 가족이 이 새로운 사태에 대하여 체념할 때까지 신랑이 자기에게 닥쳐올지 모르는 화를 모면하기 위해서 취한 현실적 조치였을 것이다. 인류학자들은 홈쳐올 때 신부가 맹렬한 저항을 할 경우에 대비하여 구혼자요, 도둑인 신랑은 납치를 도와줄 친구 몇 명을 데리고 갔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특공대원들이 오늘날의 들러리의 원형이었을 것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초기의 들러리들은 정신적인 지원이 아니라 완력을 제공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셈이다. 그들은 신부를 묶어 가지고 뛰기 일쑤였는데, 분노한 신부 측 부족 사람들이 창이나 돌 같은 것을 던지며 쫓아오는 추격을 벗어나야 했다. 밀월여행을 떠나는 차의 범퍼에 신발을 묶어 놓는 풍습은 신부를 데려간다고 신랑에게 신발을 집어던지던 영국의 관습에서 유래했는지도 모른다. 신발은 문화권에 따라 행운, 힘의 상징이 되는 등 다양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신발을 던지는 행동은 그 옛날 신부를 훔쳐 달아나는 자들에게 화가 나서 무언가를 던지던 행동을 연상시킨다.

훔친 신부를 묶던 초기의 관습도 수백 년 지나면서 서서히 변했다. 처음에는 실제로 몸을 묶던 것이 신부의 허리나 다리, 혹은 팔목을 상징적으로 슬쩍 묶는 것으로 변했다가 결국은 결혼반지로 발전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것 같다. 반지는 값을 치르고 배우자를 산다는, 훔치는 것보다는 약간 더 개명(開明)된 결혼형태의 산물이다. 신부를 재산으로 보는 관점은 마찬가지였지만, 이제 훔치는 대신 값을 치르고 사게 되었던 것이다. 결혼반지를 어느 손가락에 껴야 옳은가에 관해 수백 년간 의견이 구구했다. 네 번째 손가락에 끼는 오늘날의 관습은 아마 고대 그리스에서 왔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그릇된 해부학적 지식으로는 하나의 혈관 즉 사랑의 혈관(Venaamoris)이 그 손가락에서 곧바로 심장으로 통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결혼과 사랑의 관계를 시인했던 것이다. 이것은 고대의 관습 가운데 로맨스의 흔적이 느껴지는 매우 드문 예 가운데 하나다. 그리스인들도 그랬지만, 로마인들도 심장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그 손가락이 특별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네 번째 손가락을 그들은 '약지(藥指)'라고 불렀고, 그 손가락으로 약을 휘저었던 것이다. 오늘날 신부들은 처음으로 결혼할 때 흔히 흰 가운을 입는데, 그 색깔이 이제 막 포기하려는 순결과 처녀성을 상징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재혼하는 신부도 당당하게 하게 하얀 드레스를 입을 수 있다. 흰색은 원래 금욕이 아니라 환희를 상징하는 색깔이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흰색은 상복의 색깔이기도 하다. 일본의 신부도 흰옷을 입는데, 그것은 결혼과 함께 신부는 ‘친정 부모에게는 죽을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미국 독립전쟁 때 붉은색은 반란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 색이 인기 있는 신부복의 색깔이 되었다. 스페인 농촌 사람들은 결혼식 때 흔히 김은 옷을 입으며, 노르웨이에서는 녹색이 인기 있는 색깔이다. 비록 흰색이 원래는 처녀성이 아니라 환희를 상징하는 색이었다 하더라도 많은 문화권에서 신부의 처녀성을 중요시한다. 예를 들면 모로코는 노동자가 아내를 맞을 때 숫처녀라면 70~ 100달러를 내지만, 과부나 이혼녀라면 단돈 30달러밖에 지불하지 않는다. 20세기로 들어서기 직전, 아라비아에서는 첫날밤에 신부가 처녀가 아니었음이 판명되면, 남편은 파혼을 요구할 수 있었고 혼전성교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면 신부의 아버지나 오빠가 신부의 목을 딸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고 한다. 혼전에는 순결을 지켜야 했던 반면, 일단 결혼한 후에는 아이를 낳는 일이 중시되었다. 신부와 신랑에게 뿌려 주는 쌀은 풍요와 다산(多産)의 상징이다. 옛 문화에서는 밀을 같은 목적으로 사용했다. 모로코의 유태인들은 신부에게 계란을 던졌다. 암탉이 알을 낳듯 아이를 쉽게 자주 낳으라는 뜻이었다.

최초의 결혼케이크는 로마인들이 구워 낸 보리빵이었던 것 같다. 신랑의 집에서 그집의 불로 구워서 먹으므로 식구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신랑은 그것의 일부를 신부 머리 위에서 부서뜨렸는데, 그것은 처녀성의 상실과 결혼생활에서의 여성의 복종적 역할을 상징하는 것이다. 옛날의 앵글로색슨족은 신부와 신랑을 작고 단단한 비스킷 무더기와 함께 마주 세웠다. 신부와 신랑은 비스킷 무더기 위로 몸을 굽혀 키스를 나눠야 하는데, 이에 성공하면 재산도 모으고, 아이도 많이 낳는다고 믿었다. 결혼을 간소하게 해야 한다고 믿는 문화권은 비교적 소수에 속한다. 1967년 12월 9일 린든 존슨 대통령의 딸 린다 버드는 해군 대위와 결혼식을 백악관에서 올렸다. 이때 6만 2000달러를 들인 결혼식을 놓고 저속하게 화려한 전형적인 텍사스 스타일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결혼식에 비하면 이것은 간소한 편이었다. 아마 베트남 전쟁의 피로감에 대한 반발심이었을 것이다.

무절제한 행동으로 잘 알려진 훈족의 왕 아틸라는 453년 고트족의 처녀와 결혼하고 갑자기 죽었다. 야사(野史)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왕은 벌꿀 술을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에 죽었다고 한다. 노예를 부리던 시대에 루이지애나주에 살았던 부유한 농장주 찰스 듀랜드가 두 딸을 위해 마련한 결혼식은 호화의 극치였다. 중국에서 배로 가득 거미를 주문해다가 그의 저택으로 들어오는 1.5km의 진입로변에 늘어선 나무에다 풀어놓았다. 거미들이 나무에 거미줄을 처 놓자 듀랜드는 캘리포니아에서 속달우편으로 수백 kg의 은가루와 금가루를 주문했다. 노예들이 수동식 풀무를 이용하여 거미줄에 그 가루를 뿌렸다. 2000명의 하객이 반짝이는 이 지붕 밑을 지나서 저택 앞에 마련해 놓은 결혼식장으로 들어갔다. 18세기의 어느 영국인은 딸들에게 줄 지참금을 묘한 방법으로 책정했다. 즉 반페니짜리 동전으로 체중만큼 준다는 것이었다. 11명의 뚱뚱한 딸을 둔 그로서는 이것은 대단한 용단이었다. 제일 날씬한 딸이 50파운드 2실링 8 페니를 지참금으로 받았단다. 일부 알제리 부족이나 니카라과 원주민의 신부후보들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하다. 처녀성을 별로 중시하지 않는 이들 종족의 젊은 아가씨들은 몸을 팔아서 지참금을 마련한다. 요즘에 들으면 먼 나라의 옛 날 이야기이다. 참고로 신랑·신부의 결혼 서약에는 여러 버전이 있지만, 전통적으로 암송된 것은 영국 개신교의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가 1549년에 출판한 그의 '성공회 공동 기도서(Common Prayer)'에 포함되어 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언제든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 까지" 라는 문구이다. 그는 헨리 8세와 캐서린 왕비의 이혼을 허가했고, 그후 왕비가 낳은 딸 메리가 여왕이 되자 아쉽게도 성공회 개혁의 문제를 빌미로 화형(火刑)에 처해졌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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