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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타이어 이름이 된 콘돔 발명가 찰스 굿이어

by 금삿갓

자동차 타이어에 대한 썰렁 아재개그가 있다. 굿이어 타이어 제조면허를 산 제조업자가 아이들에게 자동차에서 가장 피곤한 부품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모든, 자동차를 싣고 도로에 마찰되는 바퀴가 가장 피곤할 거라고 했다. 그래서 바퀴를 “Tire(피곤한)”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개그다. 발명가가 부자가 될 수는 없다.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도 마찬가지였다. 천연고무를 발견한 최초의 유럽인은 콜럼버스이지만 고무(Rubber)라는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1804)였다. 프리스틀리는 고무를 가지고 연필 자국을 문질러 지우는 지우개(Rubbed out)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그의 이름이 '고무'라는 단어와 동의어가 되다시피 한 찰스 굿이어는 유복하지 못한 환경에서 태어나 비참한 가난 속에서 죽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이름을 붙인 대규모 공장을 세우지도 못했고, 고무로 타이어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내지도 못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차례 고무로 모든 것을 만들 궁리를 했던 굿이어니만큼 이것은 놀랄 만한 사실이다. 더욱이 오늘날 전 세계인이 사랑을 나눌 때 필수로 사용하는 콘돔을 그가 1855년에 발명했지만 그의 수중에는 늘 땡전 한 푼도 없었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가 “19세기 가장 위대한 발명”이라고 찬사를 보냈지만 돈을 따라 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거의 30여 년을 아무런 이득도 없이 고무를 발전시키고 실험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언젠가 그도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이것을 실험할 것이며, 탄력성 있는 이 물질의 성질에 대해서만 줄곧 생각하며 살 수 있겠는가?" 하고 한탄한 일이 있다.

<굿이어가 고무에 황을 결합하는 우연한 발견>

굿이어는 1800년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부여된 일은 자기 아버지의 소규모 철물공장에서 협력자로 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철물공장은 1830년을 넘기지 못하고 파산하고 말았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무를 호기심의 대상 정도로 생각했지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떻든 그는 고무를 주물럭거리며 지냈다. 그 당시 미국의 고무 산업은 보잘것없어서 고작 장화와 모자 그리고 마차덮개 정도를 생산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날씨가 더울 때면 고무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물렁물렁해졌고, 겨울철에 기온이 떨어지면 이번에는 딱딱하고 부서지기 쉬운 물질로 변했다. 굿이어는 고무에 어떤 물질을 혼합하면 그러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빚쟁이들에게 감금된 채 실시한 그의 첫 번째 실험에서 그는 잉크, 수프, 크림치즈, 조롱나무에서 채취한 약, 아주까리기름 등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고무와 혼합해 보았다. 생석회와 마그네시아를 섞어 보았더니 가죽과 비슷한 하얀 물질이 생겼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흰 고무를 세상에 널리 선전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 흰 고무는 산(酸)에 닿으면 곧 녹아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소량의 레몬수가 묻어도 녹았다. 그 뒤 그는 주방에서 빈둥거리다가 우연히 고무 한 방울과 유황을 난로 뚜껑 위에 흘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유황처리의 비결을 발견했다. 이렇게 유황 처리된 고무는 온도가 변화해도 그 성질이 잘 변하지 않는다. 이 비결을 발견한 해가 1839년이었다. 빚에 쪼들리면서 노력을 거듭한 끝에 굿이어는 고무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었다.

Screenshot 2025-10-10 at 21.53.55.JPG <찰스 굿이어>

그러나 문제는 아무도 그를 믿어 주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어떻든 굿이어는 그의 발견을 실용화하기 위해 필요한 돈을 구하는 데 5년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연구실과 함께 아이들의 교과서까지 팔아야만 했다. 훗날 그의 한 이웃은 굿이어의 아이들이 마당에서 설익은 감자를 서로 먼저 먹으려고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있노라고 회상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무렵 굿이어의 두 살짜리 아들이 갑작스레 죽었다. 마침내 1844년 굿이어는 유황처리법의 특허를 얻었으나. 이것이 그를 부자로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자금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특허를 싼 값에 대여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 보다 먼저, 영국에서는 토머스 핸콕(Thomas Hancock)이라는 화학자가 어찌어찌하여 굿이어가 만들어낸 새로운 고무의 견본들을 입수했다. 그는 견본 하나에서 유황 냄새를 맡았다. 핸콕은 자기 연구실에서 유황처리법을 자기 힘으로 발견해 냈다. 당시 미국에서는 굿이어의 특허신청이 아직 미결 상태에 있었다. 굿이어의 특허 신청서가 영국에 도착하기 두 달 전에 핸콕은 임시특허를 받아냈다. 그 결과 미국의 제조업자들은 굿이어에게서 제조면허를 샀지만, 유럽의 제조업자들은 핸콕에게서 제조면허를 사게 되었다. 굿이어는 또 미국에서도 몇 건의 돈이 많이 드는 특허소송을 치러야만 했다. 그중 한 소송에서는 다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가 한 시간 동안 준비한 다음 그 대리인으로 나서서 재판에 이겼다. 웹스터는 그 대가로 25,000달러를 받았는데, 그 돈은 굿이어가 그때가지 어느 한 해에 올린 수입보다도 훨씬 많은 것이었다. 하지만 굿이어는 마침내 그의 공헌으로 존경을 받게 되었다. 1855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파리 세계박람회의 최우수 금메달과 레종도뇌르 훈장을 그에게 수여했다. 마침 굿이어는 그때 파리에 있었다. 그때 그는 파리 교외의 채무자감옥에서 복역하고 있었던 것이다. 1860년 굿이어가 뉴욕에서 사망했을 때, 그는 20만 달러의 빚을 지고 있었다. 그는 어쩌면 찢어지게 가난했던 자기의 일생을 크게 후회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성공 여부를 흔히 돈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사람은 자기가 씨를 뿌렸는데도 아무도 수확을 거두지 못할 때에 그것을 애석하게 여겨야 한다.” 스스로 수확을 거두지 못해도 인류의 누군가가 그 수확을 거두어 인류에게 보탬이 되면 유용한 것으로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위대한 발명가임에 틀림이 없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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