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B급 욕망의 배설구’라고 불리던 화장실의 낙서(落書), 요즘 공중화장실이나 학교의 화장실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육체적 물리적 배설의 행위를 실행하는 순간에도 열심히 심리적 배설을 쪼그리고 앉아서 3면의 공간에 마구 해대던 낙서 말이다. 역사적으로 낙서의 기원은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페인 북부 알타미라 동굴과 프랑스 라스코·쇼베 동굴에서 발견된 벽화들은 낙서의 한 형태라 볼 수 있다. 좀 더 낙서다운 낙서는 화산 폭발로 도시 전체가 잿더미에 파묻혔던 폼페이 잔해에서 발견된 글과 그림들이다. 주로 건물의 벽체였을 돌조각들 위에는 검투사의 대결 장면이나 시인의 얼굴, 연인의 모습 등을 그려놓았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낙서가 사회현상으로 대두하는 경향을 보였다. 자본주의의 부조리와 계급 갈등, 도시의 척박함 등을 풍자한 만화가 유행하면서 소외계층이 이를 따라 그린 거리낙서가 등장했다. 20세기 거리낙서의 주요 무대는 미국 뉴욕이었다. 1960년 후반 정치적·사회적으로 혼란을 겪던 미국에서 ‘담벼락 낙서’인 그라피티(Graffiti)는 사회적 발언을 위한 수단의 하나로 등장했다. 담벼락 낙서는 1980년대 들어 예술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대표 작가인 키스 해링(Keith A. Haring)·케니 샤프(Kenny Scharf)·뱅크시(Banksy) 등이고, 해링은 페인트 스프레이를 사용하는 다른 낙서화가들과 달리 분필을 사용하고 밤이 아니라 낮에 낙서를 했다. 지하철 광고판에 그림을 그린 해링은 경찰에 수차례 체포돼 벌금을 물면서 5년간 약 5,000점의 낙서를 남겼다. 그는 수집가 토니 샤프라치(Tony Shafrazi)의 갤러리에 박탈되어 일약 스타작가로 발돋움하기도 했다. 1971년 뉴욕 지하철 벽면 곳곳에 등장한 ‘TAKI(타키) 183’이라는 낙서는 익명으로 활동하던 낙서화가들에게 사인과 같은 ‘태그(Tag)’를 유행시킨 계기가 되었다.
<화가 마르셀 뒤상이 모나리자 그림엽서에 낙서한 모습>
아무튼 낙서는 고고학자들에게 역사를 읽는 이정표를 제공했다. 그리스의 용병들과 로마의 병사들은 이집트의 기념비들에 자기의 이름을 새겼다.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에도 팜필리아(Pamphylia)에서 온 그리스 관광객이 바늘로 상처를 냈다. 알파벳시대 이전의 이런 낙서는 언어학자들에게는 풍요한 광산(鑛山)이 되었다. 로마인들이 공중변소에 낙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관리들은 벽에 신들의 그림과 상징을 그리고, 그것을 손상하면 일반범죄뿐 아니라 종교적 범죄까지 범하는 것이 되어 사형에 처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직도 남아 있는 한 로마인 가장(家長)의 낙서는 자기 집의 벽에 낙서를 하지 말라고 행인들에게 간청하는 내용이다. 중세의 낙서는 주로 교회에서 12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원주(圓柱)와 벽돌에 석공의 설계도, 기사의 투구에 꽂는 깃털장식, 필사본의 색 장식 스타일로 그러진 그림, 그리고 아름다운 필치로 쓰인 중세 라틴어, 노르만-프랑스어 또는 중세영어의 비문체(碑文體)로 된 글, 낫을 그리고 "죽음은 언제나 육체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와 같다."라는 따위의 글을 적어 넣은 것 같은 죽음에 관한 그림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런던탑의 낙서는 손톱으로 굵거나 때로는 죄수의 피로 쓴 것으로 무자비한 시대의 신앙과 불굴의 정신이 나타나 있다. 귀족계급은 대체로 낙서를 하지 않았다.(아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 사람은 감방의 벽에 가문의 문장(紋章)을 그렸다. 가장 박식하면서도 가장 달필인 것은 종교적 수인들이 한 낙서들이다. 헨리(Henry) 8세의 첫 번째 아내인 아라곤의 캐서린(Aragon Catalina)의 전속목사였으며, 왕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은 많은 성직자들 가운데 하나였던 토머스 아벨(Thomas Abell)은 그의 이름을 매우 재미있게 새겼다. 즉 종(鐘)에다 A를 새겼다. 즉 A + Bell은 그의 이름 아벨이 된다.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이 캐나다와 정상회담 때 한 낙서>
18세기에 영국의 낙서는 주막(酒幕)의 벽·문·창 그리고 접대부들의 거처에 나타나는데, 시적(詩的)인 냄새를 풍겼다. 내용은 정복을 자랑하면서 그 결과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한 난봉꾼은 재미를 본 뒤에 런던의 챈서리 레인(Chancery Lane) 거리에 있는 한 창문에 이렇게 썼다. "여기 나는 셀리아를 깔고 누웠다. 나는 매독에 걸렸고 셀리아는 반(半) 크라운(Crown)을 벌었다." 다이아몬드로 유리창에 새긴 많은 글 가운데는 연인의 이런 탄식도 있었다. "이 유리는 내 사랑의 것, 그대 마음의 상징. 그것은 깨지기 쉽고, 미끄러우며 독(毒)을 품고 있다." 그리고 여인의 날카로운 응수가 옆에 새겨져 있었다. “친절하신 선생님께 고백해야 되겠어요. 이 유리는 깨지기 쉽다는 걸 내게 입증하진 못하지만, 당신이 바보라는 걸 입증해 주는군요.” 은밀함 때문인지 또는 그 기능 때문인지 모르지만 장소와 시대를 불문하고 공중변소에서 가장 거리낌 없는 낙서가 가장 많이 발견된다. 그 내용의 대부분은 섹스와 배설에 관한 것이다. 초기의 낙서연구가들이 주목한 바 있고, 알프레드 킨제이(Alfred Kinsey)가 성행위에 관한 연구에서 다시 밝힌 바에 따르면, 남자들은 은밀한 벽에 음담(淫談)과 네 글자로 된 섹스에 관한 단어들을 휘갈기는 데 비해서, 여자들은 화살로 꿰뚫린 하트나 립스틱으로 그린 입으로 둘러싸인 이니셜(Initial : 두문자) 같은 낭만적인 공상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주로 익명의 소통, 개인의 감정 및 생각의 표현, 로맨틱한 내용 등을 표현했다.
<폼페이 화산 유적에서 발견된 낙서 : 검투사 대결>
그러나 1970년대에 대학의 화장실에서 수집한 것을 보면, 여자들도 남자들처럼 대담한 낙서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고. 거리낌 없이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자들은 그들의 정복을 자랑하고 남성의 신체적 부적절함에 관해 불평을 하고 프로이트적 해석을 가한다. "전쟁은 바로 월경(月經)에 대한 시기(猜忌)이다." 바로 이렇게. '화장실낙서'를 전문적으로 Latrinalia라고 인류학자 앨런 던즈(Alan Dundes)가 정의했다. 화장실에서 남자들의 낙서는 전통적인 자연발생적 음담과 그 성격이 전혀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학과에 따라 박식한 '재주 자랑'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버드의 인문학과에서는 이런 낙서들이 나왔다. "Luther ate worms.(루터는 벌레들을 먹었다.)" 이 말은 영어로 벌레들(worms)이 독일 남부 도시인 보름스(Worms)와 같다. 1521년에 루터는 여기서 열린 의회에서 이단자로 선고받았다. "Shakespeare eats bacon.(셰익스피어가 베이컨을 먹는다.)" 베이컨(Bacon)은 영국의 철학자·정치가도 되지만 보통명사로는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다. 물리학과에는 "Planck is constant.(플랑크는 변하지 않는다.)" 이 말은 독일의 물리학자 플랑크(Planck)가 양자역학의 기본상수인 플랑크상수(Planck's constant)를 도입했다. "Niels is Bohring.(닐스는 따분하다.)" Niels Bohr는 덴마크의 물리학자이다. 그의 이름 Bohr에 진행형인 –ing을 붙여서 철자는 한자 틀리지만 음이 비슷한 영어의 boring(따분하다)의 의미를 붙였다.
<공공 시설의 낙서 테러>
문화연구가들은 벽의 낙서를 민중의 언론, 즉 제도화된 매체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표현매체로 본다. 사회과학자들은 그것을 대중의 불만에 대한 안전판으로 본다. 심리학자들은 성적 좌절, 어린 시절의 흙장난으로의 복귀, 또는 단순히 익명의 군중 속에서 자기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한 욕구 등과 같은 잠재의식적 동기를 이야기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 현상을 권위에 대한 공격의 한 형태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현대의 낙서연구자들은 그 어떤 단일한 해석도 벽의 낙서가 취하고 있는 형태의 복합성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항변한다. 그들은 화장실 벽의 고해적 측면을 보다 열린 공간의 철학적 논쟁적 풍요성과 대비한다. 그들은 인습적인 문학적 수사학적 수단을 비인습적인 용도로 전환시키는 낙서자들의 창의력을 예시한다. 낙서연구가 프랑크 J. 단젤로(Frank J D'angelo)는 <대중문화> 잡지에서 구체적인 심리적 동기들이 일부 낙서의 이면에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 현상 자체, 즉 그 장난스러움, 창의력, 언어의 재간을 설명하는 데는 그 어떤 잠재의식적 충동도 필요치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충격, 격분, 또는 웃음을 끌어내겠다는 명백한 목적을 가진, 역설적으로 익명으로 나타나는 기막힌 솜씨의 행동인 것이다.
<루터의 이단자 선고 회의 : 보름스 의회>
화장실의 낙서도 줄어들지만, 일반적인 낙서도 한 때 흥행하던 시기에 비해서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필자 금삿갓은 인간을 무언가 자기 생각을 글이나 그림 등으로 나타 내고 싶어 하는 심리를 본래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낙서하는 인간’은 호모 스크리벤스(Homo Scribens), ‘그림으로 낙서하는 인간’은 호모 그라피티(Homo Graffiti)로 불러보는 것이다.(https://brunch.co.kr/@0306a641d711434/244)금삿갓이 산티아고 800Km를 걸을 때 보니까 우리와는 다르게 정말 낙서가 많았다. 심지어 길가의 가로수에 칼로 새긴 것도 부지기수였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이집트 피라미드의 건설과정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피라미드가 무임금 노예들을 착취하여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피라미드 주변에서 많은 ‘낙서’들이 발견되면서 그 주장은 뒤집히게 된다. 피라미드의 주변에서 발견된 낙서들에는 ‘월급은 조금 주면서 일 더럽게 많이 시키네.’라는 불만부터, ‘감독관이랑 싸워서 며칠 안 나왔는데, 집에서 마누라가 하도 바가지를 긁어서 다시 일하러 나왔네.’라는 일상의 이야기까지, 생생한 그때의 삶을 전해주고 있다고 한다. 또 어떤 낙서에는 피라미드 건설 결근 사유로 ‘어제 숙취 때문에’라고도 적혀 있다고 하니, 자칫하면 자료 부족한 역사가에 의해 왜곡될 뻔했던 생생한 이집트 민초들의 역사를, 낙서가 되돌려놓은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스마트 폰의 발달로 우리는 화장실에 앉아서 용변 보는 시간에 멍하니 딴생각을 하던가 낙서를 하지 않고 문명의 이기를 가지고 열심히 손장난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화장실뿐만 아니라 다른 은밀한 공간의 낙서가 줄어드는 것이 사회심리적으로 꼭 좋은 면만 있는 것을 아닐 것으로 짐작한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