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전부터 공공연히 큰소리치던 트럼프의 관세(關稅) 정책이 세계 경제와 무역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특히나 부존자원(賦存資源)이 빈약하여 수출로 성장을 이룩한 우리로서는 엄청난 역풍이 몰아친다. 관세는 수입품에 부과되는 세금이다. 세금은 외국 제품을 들여오는 사람이 자기 정부에 납부하고, 추가 비용의 일부 또는 전부를 고객(수출자 또는 수입국 소비자)에게 전가할 수 있다. 아니면 수입하는 상품의 양을 줄이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이러한 관세는 경제활동과 밀접하여 오랜 역사를 가졌다. 기원전 2천 년 전 아나톨리아(Anatolia)에 있는 카네시(Kanesh)의 고대 아시리아 무역상인 기록은 지역 통치자들이 금속과 직물을 거래하는 대상(Caravan)에게 세금을 부과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에서는 아테네가 도시 국가의 필요를 충당하기 위해 피레아스(Piraeus) 항구에서 곡물과 같은 필수 수입품에 2%의 관세를 부과했다. 로마 제국 역시 로마 속주(屬州) 내 국내 무역에는 약 1~5%, 아시아나 기타 지역은 12~25%의 관세를 부과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중세시대의 관세는 아주 널리 전파되어, 국가의 세수(稅收) 확보에 큰 보탬이 되도록 성문(城門)이나 교역로, 항구 등에서 부과했다. 요즘은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수입에 관세를 물리지만, 중세 영국은 양모의 수출에 높은 관세를 부과했다. 가죽·주석·치즈와 같은 다른 상품에도 유사한 관세가 부과되었다.
이러한 관세는 수입을 창출하고 지역 생산자들을 보호해 주었지만, 동시에 밀수와 창의적인 탈세를 부추겼다. 높은 관세는 유럽 전역의 중상주의 정책의 특징이었다. 튜더 왕조 시대의 영국부터 부르봉 왕조 시대의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통치자들은 높은 수입 관세와 전면적인 수입 금지를 통해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특히 제조품의 수입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1720년까지 영국의 수입 제품에 대한 관세는 평균 45~55%로 오늘날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높았는데, 영국은 보호벽 뒤에서 섬유 및 금속 산업을 육성했다. 프랑스도 산업과 해군을 육성하기 위해 높은 관세를 부과했고, 영국·스페인 등 식민지 강국들은 식민지의 자유로운 무역이나 경쟁 산업 개발을 금지했다. 동양의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부터 비단, 차 등 외부 유입 물품에 세금을 부과했다. 청나라 시대에는 '관세(關稅)'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당나라에는 해외무역을 전담하던 시박사(市舶司)라는 관청이 있었는데, 이것이 중국 세관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경우 장보고의 청해진이 세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될 뿐 뚜렷한 기록이 없으나, 고려 예종원년(1106년)에 관진상세(關津商稅)를 폐지했다는 기록을 보면 고려 이전부터 관세 성격의 세금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곡물법 폐지를 청원하는 군중들>
1776년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중상주의 관세를 날카롭게 비판한 저서 『국부론』 을 출간했다. 스미스는 관세와 무역 제한을 낮게 유지하는 것이 모든 국가에 이롭다고 주장했다. 그는 "관세와 기타 세금은 대개 소비자에게 더 비싼 상품을 제공하고 산업을 저해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말하자면 보호무역주의 보다 자유무역주의가 국부 창출의 길이라는 것이다. 1817년,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는 비교우위 이론을 통해 이러한 생각을 더욱 강화했다. 반면 "자유로운 수출과 수입"은 각국이 가장 잘 생산하는 상품에 집중함으로써 즉 분업화로 번영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했다. 2,100년 전 중국의 사마천(司馬遷)도 그의 저서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이런 비슷한 이론을 먼저 주장한 바가 있다. 어쨌든 관세정책에 대한 경제학계나 정치지도자들의 논쟁과 실행은 국가마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오늘의 주제가 트럼프의 관세 정책이니 미국의 역사적 사실을 주로 살펴보자. 건국 초기 미국에서 관세는 신생 연방 정부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여겨졌다. 초대 미국 의회는 1789년에 관세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주로 세수 확보를 위한 목적이었다. 19세기 초 수십 년 동안 미국의 관세율은 비교적 낮은 수준을 유지했는데, 특히 면화 수출과 공산품 수입에 의존하는 농업 중심의 남부 주들을 달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신생 미국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압력이 점차 커졌다. 1828년까지 북부 제조업체들을 보호할 명분으로 가파른 관세 인상을 단행했다. 남부가 "가증스러운 관세"라고 비난했던, 1828년 관세는 수입 관세를 너무 높게 인상하여 헌법적 위기를 초래할 뻔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관세를 무효화하고 연방에서 탈퇴하겠다고 위협했고, 결국 1833년 타협안을 통해 관세를 인하해야 했다. 신생 연방에 거의 재앙에 가까운 이 사태는 미국 정책 입안자들에게 관세가 어떻게 보호받는 산업계와 원자재 수출업체를 대립시켜 지역적 정치적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래도 19세기까지 미국의 과세 대상 상품에 대한 평균 수입 관세는 40%에서 50%에 달했으며,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의 유치산업론(幼稚産業論)으로 리카도의 자유무역론을 거부하고 자국 제조업체들을 보호함으로써 미국은 급속한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다. 반면에 영국은 1820년까지도 수입관세를 평균 50%로 유지했다. 자유무역옹호자들의 노력으로 1846년에 곡물 수입관세가 폐지되었고, 가장 먼저 산업화를 이룬 덕으로 자유무역 정책을 고수했다. 독일도 1871년에 통일하여 비스마르크의 지휘 하에 보호무역주의를 채택했다. 서구 열강은 식민지에게 일방적인 관세 상한선을 5%로 묶어 강요했다. 천연자원의 풍부함과 국내 시장 규모 등 다른 요인들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한 통계로, 1870년부터 1913년까지 영국의 산업 성장률(연간 약 2%)은 보호무역주의 성향이 더 강했던 미국과 독일(연간 4~5%)에 뒤처졌다. 이 사실이 보호무역을 선호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스무트-홀리 법안의 풍자>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유럽과 미국의 경제적 상황은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오랜 전쟁의 대가로 유럽의 산업과 농업은 피폐해졌지만, 전선 밖에 있던 미국은 전쟁 물자와 식량을 공급하며 전쟁의 최대 수혜국이 되었다. 전쟁 중 미국의 생산력에 의존했던 유럽 각국은 전후 채무국으로 전락했다. 미국은 세계 최대 채권국으로 부상했고, 달러화는 영국의 파운드와 함께 글로벌 기축통화 지위를 굳혔다. 미국은 세계 1위 수출국으로 도약했고, 노동자의 1인당 생산성은 영국과 프랑스의 두 배를 넘었다. 전체 제조업 생산의 40%를 담당하며 ‘세계의 공장’으로 자리 잡았다. 중서부 곡창지대도 전쟁 특수를 누렸다. 유럽연합국의 전투식량과 국민의 ‘빵 바구니’ 역할로 미국 농산물 수요가 폭등하면서, 기계화 영농을 통한 농장의 기업화가 촉진됐다. 농장주들은 은행 대출로 대규모 투자에 나섰다. 그러나 종전 후 유럽의 농업 생산이 회복되자 역풍이 불었다. 미국산 농작물 수요가 급감해 전후 2년 동안 곡물과 면화의 국제가격이 반 토막 났다. 미국의 농업 기반이 붕괴하기 직전이었다.
전임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의 실정으로 1920년 대통령 선거에서 평판이 낮은 공화당의 워런 하딩(Warren Harding)이 60.3%라는 경이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사실 그는 공화당 내 계파 간 갈등으로 인한 어부지리로 후보가 되었다. 9번의 경선 투표에도 후보가 결정되지 못하자 실내는 담배연기로 꽉 차서 숨을 쉴 수도 없었단다. 그래서 계파 간 조정 끝에 가장 다루기 쉬운 그를 들러리로 뽑은 것이다. 여담이지만 그때 상대진영 민주당의 후보 제임스 콕스(James Cox)는 44번 투표 끝에 뽑혔으니 대단했지만 전임의 실정 덕에 낙선했다. 윌슨은 앤드류 멜런(Andrew Mellon)을 재무장관으로 임명하여 농장주 지원과 보호를 강화했고, 1922년 수입 관세를 평균 38%로 올리는 ‘포드니-맥컴버(Fordey-McCumber) 법’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수입품에 평균 38.5%의 관세를 부과해서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 했지만 실질적 수혜는 공산품 산업에 돌아갔다.
1920년대 미국 산업은 기술혁신과 보호관세의 시너지로 승승장구했다. 자본이익률(ROE)은 43% 상승했고, 실업률은 4% 이하로 떨어졌다. ‘포효하는 1920년대’로 불린 이 시기, 미국 경제는 전례 없는 호황을 구가했다. 이재명 정부 집권 후 경제가 침체인데도 코스피 지수가 급격 상승하듯이 다우존스 지수가 1928년 이후 16개월간 90% 폭등하며 주가도 고공비행을 이어갔다. 하지만 관세의 부과와 성장의 과실은 산업 자본가와 도시에 집중되었고, 소외된 농업 경제는 추락을 거듭했다. 1928년 대선에서 승리한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대통령은 지지층인 농민을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했다. 그는 1930년 스무트-홀리(Smoot-Hawley) 관세법에 서명하여 세율은 59%로 치솟았다. 이미 미국의 고율 관세에 불만을 품고 있던 유럽과 캐나다는 즉각 반발해 보복 조치에 나섰다. 프랑스는 자동차에 100%, 스페인은 수입품에 모두 40%, 독일과 이탈리아는 밀에 관세를 부고하고 또한 수입 쿼터로 맞섰다. 그러자 미국의 수출은 30% 급감했고, 세계 교역량은 관세 인상 후 3년 동안 75%나 줄었다. 전 세계를 대공황으로 몰아넣은 교역 붕괴는 관세 인상 그 자체보다, 각국의 보복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하딩 시절의 관세 인상에는 참고 넘겼던 유럽 각국이, 자존심이 상하자 전면적인 보복으로 응수했고, 그 파장은 세계 경제 전체를 뒤흔들었다. 세계 무역이 약 3분의 2 감소하자 이는 수출에 의존하는 산업의 침체와 실업률의 악화로 대공황의 여파를 더욱 심화시켰다.
마치 지금 트럼프가 우방이든 아니든 무차별적으로 관세전쟁을 실행하는 행태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스무트-홀리 관세법은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고 경제적으로 해로운 무역 정책 중 하나로 기억된다. 당시에도 1,000명이 넘는 경제학자들이 경제적 파장을 경고하는 공개 청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세 법안에 서명했다. 1934년이 되어서야 루스벨트가 이 법을 점진적으로 폐지시켰다. 말하자면 상대국 간에 무역협정을 체결하여 교역을 하는 제도가 정착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발전하여 1947년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23개국이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에 서명했다. GATT의 기본 원칙은 연속적인 협상을 통해 관세를 상호 인하하여 1930년대처럼 격화되었던 무역 전쟁의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 당시 회원국 평균 22%의 관세율이 5%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후속기구인 세계무역기구(WTO)를 1995년 설립하여 관세를 사상 최저 수준으로 낮추는 데 기여하여 세계 무역 확대 시대를 열었다. 관세의 인하는 곧 세계를 블록화 하여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유럽경제공동체(EEC) 등을 태동시켰다. 더 나아가서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발전하여 무관세 교역을 가능하게 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는 지금까지 중국과 같은 전통적인 적대국과 캐나다·멕시코·EU·Asian국과 같은 전통적인 동맹국 모두를 대상으로 새로운 관세, 관세 위협, 일시적인 관세 유예, 그리고 추가 관세 부과라는 혼란스러운 공세를 쏟아내고 있다. WTO 규정은 임의적인 관세 인상을 금지하고 있지만, 주요 강대국들이 국가 안보 또는 기타 예외를 들어 관세 부과하니까 사실 WTO 시스템은 형해화(形骸化) 되었다. 그는 관세가 정부의 세금 징수액을 늘리고, 소비자들이 미국산 제품을 더 많이 구매하도록 장려하며, 미국에 대한 투자를 촉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무역 적자, 즉 다른 나라에서 구매하는 상품의 가치와 다른 나라에 판매하는 상품의 가치 간의 격차를 줄이고 싶어 한다. 그는 미국이 "사기꾼"에 의해 착취당하고 외국인에 의해 "약탈당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난 8월, 미국 항소법원은 트럼프가 발표한 대부분의 관세가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연방대법원의 판단이 남았지만 귀추가 주목된다. 여담이지만 미국 독립전쟁의 시발점으로 알려진 이른바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가 영국의 지나친 세금 징수에 반발한 식민지 주민들이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더 큰 이익을 위한 밀수업자들이 개입된 것이란다. 미국 여러 가지 행정기관의 역사적 원류는 대부분 세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해양경찰과 공중보건소, 원호처, 상무성, 통계국, 국세청, 이민청, 마약수사청 등 미국의 주요 국가 기구가 모두 미국 세관에서 출발한 것이라니 흥미롭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