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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九日龍山飮(구일용산음) / 중양절 용산서 마시다

금삿갓의 漢詩工夫(251031)

by 금삿갓

九日龍山飮(구일용산음) / 중양절에 용산에서 마시다.

- 李白(이백)


九日龍山飮

구일용산음

●●○○●

9월 9일(중양절) 용산에서 마시노라니


黃花笑逐臣

황화소축신

○○●●◎

국화가 쫓겨난 신하를 비웃네.


醉看風落帽

취간풍락모

●○○●●

취해서 보니 바람에 모자가 날리고


舞愛月留人

무애월류인

●●●○◎

춤에 빠진 달빛이 나를 잡누나.

구름.JPG

九月九日會飮于龍山(구월구일회음우용산)할 새. 滿山之黃花如笑逐臣(만산지황화여소축신)이라. 醉中(취중)에 看風落之帽(간풍낙지모)하고 舞時(무시)에 愛月留之人(애월류지인)이라. 佳節把酒可謂樂矣而風落月留亦可以觀(가절파주가위락의이풍락월류역가이관)이오. 亦可以愛也(역가이애야)로다.

9월 9일(중양절)에 용산에서 모여 술을 마시니, 산에 가득한 노란 국화가 쫓겨 난 신하를 비웃는 것 같아, 취중에 바람에 떨어지는 모자를 보고, 춤출 때에, 사랑스러운 달빛이 사람을 머물게 함이다. 아름다운 계절에 술잔 들고 그야말로 즐기니, 바람에 떨어지고 달빛에 머무르는 것 역시 볼만한 것이요. 또한 사랑할 만한 것이다.

* 龍山(용산) : 안후이(安徽) 성에 있는 당도현(當涂縣), 구불구불 용처럼 굽이치는 시냇가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용산은 현 동남쪽 십 이리에 있다.

* 逐臣(축신) : 조정에서 쫓겨나 귀양 간 신하. 여기서는 이백 자신을 가리킨다.

* 風落帽(풍락모) : 바람에 모자가 날려 떨어지는 것으로 용산낙모(龍山落帽)라는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 맹가전(孟軻傳)에 고사가 나온다. 진(晉)의 환온(桓溫)이 중양절에 용산에 올라 노니는데, 맹가의 모자가 바람에 날아갔는데도 그가 깨닫지 못하자 자리에 앉아 두 사람이 시로써 이를 수답(酬答)하며 놀았다.

달.JPG

* 이백(李白, 701~762) : 중국 성당기(盛唐期)의 시인으로서 자는 태백(太白)이며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다. 이백은 중국의 수많은 시인 가운데 두보와 더불어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칭송되며, 오늘날 이두(李杜)라 병칭 하며 두보를 시성(詩聖),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부른다. 출생지와 혈통에 관해서는 정설이 없고 관련 기록을 참고하여 유추해 보면 수나라 말에 그의 먼 조상이 서역(西域)으로 유배되어 갔다가 당나라 신룡(神龍) 원년(705)에 그의 부친 이객(李客)이 몰래 가족들을 데리고 촉(蜀)이라는 지방의 사천성(四川省) 면주(綿州) 창명현(彰明縣) 청련향(靑蓮鄕)에 들어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백은 서역에서 태어나 5세 때 서역에서 무역상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들어와 25세까지 20년 동안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청련거사라는 그의 자작호도 자신의 고향이라 여긴 청련향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호방한 성품의 이백은 학문에도 자질이 있어 부친으로부터 가학(家學) 교육받고, 일찍이 어려서부터 학문을 연마하여 다방면의 지식과 사상을 습득하였다. 이백은 지방 관리에게 자신을 천거하는 편지글에서 5세 때 60 갑자를 외웠고, 10세 때 유가를 비롯한 제자백가의 사상을 섭렵하여 황제 헌원 이후의 일을 알고 있었다. 15세 때 기서(奇書)를 읽고 부(賦)를 지어 사마상여(司馬相如, 기원전 179~기원전 117)를 능가하였으며, 검술을 좋아하고 두루 지방 관리들을 배알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송나라 축목(祝穆)이 편찬한 『방여승람(方輿勝覽)』의 기록에 의하면 이백이 미주(眉洲)의 상이산(象耳山)에서 독서할 때 공부에 싫증을 내고 하산하다가 한 노인이 시냇물 옆 숫돌에 절구를 놓아두었는데, 이백이 노인에게 왜 그것을 갈고 있느냐고 물으니 노인이 바늘을 만들려고 한다고 답했다. 이에 이백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이후 학문에 계속 정진하기로 마음먹고 산으로 다시 돌아가 독서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마저성침(磨杵針)의 고사가 인구에 회자되었다. 이백은 10대 후반에 민산(岷山)의 남쪽에서 동엄자(東嚴子)라는 은자를 스승으로 도술을 배우며 세속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동강(潼江), 지금의 재주(梓州) 부근의 산에서 은거하고 있는 은사 조유(趙蕤)를 방문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정치사상이 이백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백이 흠모하였던 역사상 인물들은 관중(管仲), 안영(晏嬰), 악의(樂毅), 장량(張良), 제갈량(諸葛亮), 소진(蘇秦), 노중련(魯仲連) 등이 있다. 특히 계책에 능하고 공을 세우고도 상을 받지 않고 절개를 지킨 노중련에 대한 이백의 존경과 추종은 지대하여 여러 편의 시에서 찬양하고 있다. 노중련에 대한 이백의 각별한 존경과 숭상하는 마음은 「고풍(古風)」 제10수에 잘 나타나 있다.


말년에 이백은 장안을 떠나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遊歷)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石門 : 陝西省)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 :현재의 揚州)·금릉(金陵 : 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 : 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 : 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 : 江西省 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 : 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當塗 : 安徽)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 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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