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직접 가 보지는 못 했고, 들은 얘기로 대구 달성공원에 키다리 아저씨가 있다고 했다. 키가 225cm인 그가 수문장(守門將)을 한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 호기심을 많이 가지고 보러 가고 싶었지만 이루지 못했다. 그때는 빨리 키도 크고 자라서 어른이 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지금은 어려졌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 큰 키가 부러웠는데 순례길 와서 비로소 키다리 아저씨의 꿈을 이루었다.
성인이 되고 도회지 생활을 하면서 그림자에 관심이 없었다. 어릴 땐 친구들과 서로 그림자밟기도 하고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 순례길을 걸으면서 드디어 그림자의 존재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그림자는 나의 분신처럼 나와 같이 붙어서 걷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며, 쉬느라 그늘로 들어가면 몰래 사라진다. 이 녀석을 관찰하면서 걸으면 한동안은 순례길의 피곤함을 잊곤 한다.
새벽 일찍, 보통 5시에 기상해서 출발 준비를 하여, 6시 되기 전부터 걷기 시작하면 아직 해가 뜨기 전이다. 랜턴을 켜고 걸어야 길을 찾을 수 있다. 먼동이 트고 일출이 장관을 이룬 후에 한참 지나야 조선 과객 금삿갓 모양을 닮은 그림자란 녀석이 슬그머니 나타나서 같이 걷는다. 이 시점이 나의 분신의 키가 가장 클 시점이다. 편편한 장소를 만나면 거의 50m 정도의 크기다. 정말 롱다리이다. 그 다리로 성큼성큼 걸으면 보름도 안 걸려서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을 텐데.
조선 과객 금삿갓이 김삿갓 선배의 모든 걸 쫓아갈 수 없지만 술 좋아하는 것은 닮았다. 그러다 보니 시선(詩仙)인 이태백의 시 중에서 월하독작(月下獨酌) 4 수(首)를 모두 좋아한다. 정말 마음에 꼭 와닿는 절창이다. 그중 제1수에서 달과 그림자와 함께 셋이서 술을 즐긴다.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 꽃 사이에서 한 병의 술을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 서로 친한 이 없이 홀로 마시네
舉杯邀明月(거배요명월) / 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고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 그림자를 대하니 셋을 이루누나.
月既不解飲(월기불해음) / 달은 이미 술로 풀지 못하고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 그림자는 무리되어 내 몸을 따르네.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 잠깐 달을 짝하고 그림자와 함께
行樂須及春(행락수급춘) / 즐겁게 노는 건 봄날이 좋구나
我歌月徘徊(아가월배회) / 내가 노래하면 달이 배회하고
我舞影零亂(아무영령란) /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도 어지럽네.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 깼을 때는 같이 기쁨을 나누고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 / 최한 후엔 각자 나뉘어 흩어지네.
永結無情遊(영결무정유) / 정이 떠나지 않게 길게 맺으려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 먼 은하수를 두고 서로 기약하세.
금삿갓도 이태백처럼 술을 좋아하지만 순례길을 걸으면서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간중간 주막 격인 마을의 바르(Bar : 스페인에서는 바를 '바르'라 한다.)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 정도로 만족한다. 조선 과객과 함께 걷는 그림자는 있지만 달은 없을 때가 더 많다. 그래서 구름을 친구로 불러 같이 걷는다. 구름과 바람과 그림자 이렇게 넷이다. 이태백 보다 술은 없지만 동반자는 많다. 키다리 내 분신은 시간이 지나면서 늙어가는지 키가 점점 줄어든다. 이 친구 키가 줄어들면 날도 더 더워져서 땀이 난다. 그래서 난쟁이 그림자가 될 때쯤에는 그늘을 찾게 되고 이백의 시처럼 그림자와 각자 분산하여 없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