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사람들은 이 지역을 띠에라 데 깜뽀스(Tierra de Campos) 즉 농장의 들판 정도의 뜻이겠다. 프로미스타(Fromista) 마을 이름이 고대 라틴어로는 곡물이라는 뜻이라니까 이 주변이 곡창지대임에 틀림없다. 어젯밤에 잠을 잔 보아디야 델 카미노(Boadilla del Camino)에서 새벽 6시에 출발하였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아서 온 세상이 어둑어둑한 가운데 랜턴을 켜서 길을 찾아 걷는다. 아득히 먼 저쪽에서 먼동이 조금씩 터오고 있는 중이다. 평평한 밀밭 지역인 띠에라 데 깜보스를 5Km가량 걸어오면 카스티야 운하(Canal de Castilla) 지역에 도달한다. 이곳에 카스띠야 운하의 갑문(Esclusa)이 있다. 순례길에 바로 붙어 있어서 컴컴한 와중에 콸콸거리는 물소리와 물줄기가 그나마 장관을 이루어서 구경을 하면서 사진 몇 컷을 찍으려고 잠시 머물렀다. 그런데 그게 정말 패착(敗着)이었다. 이곳이 극성 모기떼 서식지였다.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그들로부터 집단 공격을 받고서야 재빨리 그 지역을 벗어났다.
이 카스띠야 운하는 이곳 곡창지대의 곡물을 스페인의 북쪽에 있는 산탄데르(Santander) 항구로 이동하기 위한 운송로의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1753년 페르난도(Ferdinand) 6세의 통치 기간 중에 엔세나다(Ensenada) 후작에 의해 400Km의 계획으로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스페인 독립전쟁, 예산 제약, 북쪽 칸타브리아 산맥의 통과 등 많은 제약 조건으로 결국 초기 계획을 축소시켜 1849년 207Km만 완공하게 되었다. 그것 만으로도 건설에 거의 100년이 걸렸고, 19세기에 북부 스페인 철도가 건설되어 결국 영원히 중단되었다. 이 운하는 1850년에서 1870년 사이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는데, 당시 최대 400척의 바지선이 짐을 날았다고 한다. 나중에 운하는 운송 수단으로써 철도 화물에 비해 상대적인 비효율성과 느림으로 인해 이 운하는 거대한 관개 시스템의 중추로 발전했다. 운하의 큰 그림은 'Y' 자를 역방향으로 세운 모양으로, 팔렌시아(Palencia) 지역의 알라르 델 레이(Alar del Rey)와 바야돌리드(Valadolid) 지역의 메디나 데 리오세코(Medina de Rioseco), 부르고스(Burgos) 주의 산 요렌테 데 라 베가(San Llorente de la Vega)를 연결한다. 운하의 폭은 11m에서 22m 사이, 깊이는 1.8m에서 3m 사이이며, 이 주변 지역을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있다. 1991년에 스페인의 비엔 데 인테레스(Bien de Interes)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지금도 48개 자방자치 단체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이런 운하가 이처럼 고원 곡창 지대의 젖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운하의 갑문과 수로를 지나서 평원을 걷는데, 동쪽하늘에서 서서히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다. 프로미스타는 팔렌시아 지의 중소 도시로 철도가 들어온다. 순례길을 걸어 시내로 접근하는데, 실로 오랜만에 철로를 보았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나가는 버스도 거의 보지 못했는데 철도를 보니 반갑고, 기차를 타고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철길을 가로질러 시내에 접어들자 시장기가 돌았다. 마을에 일찍 문을 열어 놓은 빵집이 있어서 거기에서 아침을 해결하기로 했다. 빵집에 들어가니 마침 일요일 아침이라서 마을 사람들이 아침 식사용 빵을 사러 서 줄을 서 있다. 서양 사람들의 느긋함을 익히 참아야 하는 관계로 조선 과객 금삿갓도 조바심을 버리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드디어 간단하게 요기를 하는데 한국에서 온 여성 순례길들이 서너 명 들어왔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하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들은 분당에서 딸 셋을 데리고 온 아주머니로 여기 프로미스타에서 숙박을 했단다. 발도 아프고 힘들어서 여기서 기차를 타고 100Km 이상 떨어진 다음 도시 레온(Leon)까지 가서 한국에서 들어오는 남편과 합류한다고 했다. 기차를 타고 100Km나 이동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은근히 부러웠다. 금삿갓은 두 발로 3일 이상을 걸어야 도달할 거리인데, 한 시간 만에 당도하니까.
간단하게 요기를 한 후에 마을의 가까운 곳을 둘러보았다. 이 마을은 옛날부터 치즈가 유명했다고 한다. 알폰소 12세 시절에 왕실에 치즈를 공급하여 왕가의 치즈로 불리기도 했단다. 지금은 그 당시 치즈 공장을 개조하여 La VentanBoffard 레스토랑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마을에는 세 개의 제법 큰 성당이었다. 하나는 산 마르띤 성당(Iglesia de San Martin)으로 11세기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며 가장 순수하고 완벽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좋은 예라고 한다. 늘씬한 탑과 문, 아치,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당나귀, 음악가, 곡예사, 여러 얼굴 등 각각 다른 장식이 되어 있는 주두와 300개가 넘는 추녀 받침이 독특하다. 또한 성당 내부에는 식물, 동물, 복잡한 장식이 새겨진 주두가 있으며 13세기의 십자가상과 조각상들이 있다. 또 16세기에 만들어졌으며 1944년 스페인 문화 자산으로 지정된 까스띠요의 성모 성당(Iglesia de Nuestra Senora del Castillo)이 있으며, 산 뻬드로 성당(Iglesia de San Pedro)은 15세기에 건축되었고, 고딕 양식으로 성당 안에 봉헌화 작품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산 마르틴 성당에는 기적을 일으키는 성체의 접시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어느 날 화재가 일어나 산 마르띤 성당에 딸려있는 순례자 병원이 불에 타버렸다. 병원의 재건축을 맡은 사람이 건축에 필요한 비용이 없어서 자금을 유대인에게 빌렸고 그 돈으로 병원을 다시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약속한 날짜가 다가왔지만 그는 돈을 갚을 수 없자 그는 또 몰래 다른 곳에서 돈을 빌려 유대인의 돈을 갚았다. 그 후 세월이 흘러 그가 죽을 때가 다가오자 그는 종부 성사를 받고 성체를 모시고자 했으나 성체가 접시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단다. 그가 병원을 짓기 위해 두 번이나 돈을 빌린 것을 고백하지 않아서 그런 거다. 그래서 고백을 하고 용서를 구하자 마침내 성체를 모실 수 있게 되어 평화롭게 잠들 수 있었다고 하는 전설이다. 또 이 마을에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와이너리도 있다. 보데가 사르사비야 와이너리(Bodegas Zarzavilla)인데 평소에는 넓은 정원에서 야외 결혼식 장소로 많이 활용되곤 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