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운사 Nov 20. 2023

27> 自寬(자관) / 스스로 편안히

漢詩工夫 (231114)

自寬(자관) / 스스로 편안히

- 부용당(芙蓉堂) 김운초(金雲楚)


鏡裏癯容物外身

경리구용물외신

●●○○●●◎

거울 속 야윈 얼굴 저 세상 사람 같아


寒梅影子竹精神

한매영자죽정신

○○●●●○◎

찬 매화 그림자에 대쪽 같은 정신이라.


逢人不道人間事

봉인부도인간사

○○●●○○●

사람을 만나도 인간사 말하지 않으니


便是人間無事人

변시인간무사인

●●○○○●◎

이는 곧 세상에 무사하게 사는 사람일세.

이 시는 부용당(芙蓉堂) 김운초(金雲楚)가 한가한 날에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스스로에게 자신을 너그럽게 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詩)이다. 기구(起句) 2번 자인 리(裏) 자가 측성(仄聲)이라서 측기식(仄起式) 칠언절구(七言絶句)이다. 압운(押韻)은 ◎표기한 신(身), 신(神), 인(人)이고 진운목(眞韻目)이다. 각 구(句)의 이사부동(二四不同)·이륙동(二六同) 조건을 잘 충족하였고, 결구(結句)의 5번 자 무(無) 자의  평측(平仄)을 변형시켰다. 어려운 시어는 다음과 같다. 자관(自寬)은 스스로 관대하고 너그럽게 대하는 것이다. 경리(鏡裏)는 거울 속을 말한다. 구용(癯容)은 야윈 얼굴이다. 물외(物外)는 물건의 바깥 즉 세상 밖을 말하므로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을 지칭한다. 인간 세상이 아닌 천상이나 신선의 세계일 수도 있다. 한매(寒梅) 차가운 매화로서 추운 날씨에 핀 매화이다. 영자(影子)는 그림자인데, 자(子) 자는 뜻을 거지 것이 아니라 조사로서 시의 운율을 맞추려고 붙인 글자이다. 죽정신(竹精神)은 대쪽 같은 정신이다. 봉인(逢人)은 사람을 대하다 또는 사람을 만나다. 부도(不道)는 말하지 않다로 ‘道’는 말할 도이다. 변시(便是)는 다른 것이 아니라 곧을 나타내는 말이다. 편할 편(便)으로 읽히지만 여기서는 문득 변, 곧 변으로 읽힌다. 무사(無事)는 탈이 없이 또는 아무 일 없이를 나타낸다.

작가는 부용당(芙蓉堂) 김운초(金雲楚)로 조선시대의 여류시인이다. 시를 잘 지어 유고집에 『운초당시고(雲楚堂詩稿)』와 『오강루 문집(五江樓文集)』이 있다. 이 문집에 실려 있는 시는 규방문학의 정수로 꼽히고 있다. 그녀는 평안남도 성천(成川) 출생으로 성천의 명기로서 가무와 시문에 뛰어났다. 당시 함경감사였던 김이양(金履陽)의 인정을 받아 종유 하다가 기생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소실이 된 뒤로 시와 거문고로 여생을 보냈다. 우아한 천품(天稟)과 재예를 겸비하고 있어 당시 명사들과 교유, 수창(酬唱)했고, 특히 김이양과 동거하면서 그와 수창한 많은 시를 남겼다. 당시 같은 여류시인이었던 김금원(金錦園)의 삼호정(三湖亭)을 근거로 삼호정시사를 만들어 같이 시회를 열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시인은 삶이 그렇듯이 위의 작품을 살펴보면 초반에 본인의 내외면에 대한 냉철한 평가를 한다. 거울 속에 보이는 야윈 얼굴이 인간세상이 아인 물외(物外)의 인간으로 평가하고, 매화 그림자에는 대쪽 같은 정신이라고 했다. 비록 늙어가고 야위어 가지만 대쪽 같은 자기의 마음을 그대로 잘 노정하고 있다. 시상은 본인에 대한 냉혹한 평가와 긍정적인 생각이 교차함으로써 시적인 그림 얼개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서도 자기의 내밀한 인간사를 차마 말하지 않고 살아야 이 세상을 탈 없이 살 수 있는 것이다. 사람 좋다고 자기의 치부나 모든 것을 다 까발리고 떠벌인다면 오히려 손가락질당하고 따돌림당할 수 있는 현시대의 세태와도 비슷한 것이다. 본인의 신분이 원래 양반의 후예였지만 가난으로 기생이 되었다가 양반의 소실(小室)로 살아가는 처량한 운명에 대한 한탄으로도 보인다.

★ 김운초(金雲楚, 1820~1869) : 호는 부용(芙蓉) 또는 추수(秋水)이며, 황해도 성천(成川)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하였다고 한다.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그다음 해 어머니마저 잃게 된 김부용은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김부용은 12세에 기적에 오른 기녀였지만 16세에 성천 군민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인기를 얻었다. 한시(漢詩) 350여 수를 남겼다. 22세 때에 김부용은 평양 감사와 호조 판서를 지낸 41살 차이 나는 김이양(金履陽, 1761~1852)의 부실로 들어갔다. 죽어서는 김이양의 묘 근처에 묻혔다. 시문집으로는 『운초당시고(雲楚堂詩稿)』와 『오강루 문집(五江樓文集)』 등이 있다. 지금의 김부용 무덤은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 1리에 새롭게 조성된 것으로 봉분 1기와 비 1기가 세워져 있다. 기녀 출신의 묘로 돌보는 이가 없어 평평하게 된 것을 1974년 한국 문인 협회 천안 지부의 주관으로 봉분을 다시 쌓고, 안내판을 세웠다. 매년 4월 말에 추모제를 지낸다.

매거진의 이전글 26> 奚童(해동) / 어린 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