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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Dec 12. 2023

30> 返俗謠(반속요) / 환속의 노래

漢詩工夫 (231208)

返俗謠(반속요) / 환속의 노래

- 薛瑤(설요)


化雲心兮思貞淑

화운심혜사정숙

●○○○●○●

구름의 마음 됨이여, 생각을 곧고 맑게 하였네.


洞寂寞兮不見人

동적막혜불견인

●●●○●●◎

골짜기의 적막함이여, 아무도 보이지 않네.


瑤草芳兮思芬蒕

요초방혜사분온

○●○○○○○

요초의 꽃다움이여, 향기로움을 생각하노니.


將奈何兮是靑春

장내하혜시청춘

○●○○●○◎

장차 어찌하리오, 이내 젊은 청춘을?

제목 반속요(返俗謠)는 즉 세속으로 돌아오면서 쓴 노래라는 뜻이다. 스님으로 출가(出家)를 했다가 무슨 연유인지 다시 속세로 돌아오게 된 심정을 읊은 것이다. 사람 구경하기도 힘든 적막한 산사의 풍경과 고운 꽃들이 향기롭게 핀 모습을 보고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당시(680년 경) 작자 설요(薛瑤)는 당(唐) 나라에 거주하는 신라인으로 21세 정도였다. 미모가 뛰어나 선자(仙子)로 불렸던 설요는 얼굴이 아름답고 시를 잘 쓸 정도로 학문과 감성이 풍부했던 여인이었다. 그러한 그녀로서는 적막한 산사 생활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시는 성당(盛唐) 시절 신체시(新體詩)의 규범이 확립되기 전의 작품으로 신체시 칠언절구(七言絶句)의 규범과는 맞지 않는다. 이 시는 기구(起句)의 2번 자인 운(雲) 자가 평성(平聲)이라서 평기식(平起式) 칠언절구(七言絶句)이다. 압운(押韻)은 기구(起句)에는 없고, 승구(承句)와 결구(結句)에만 ◎표시를 한 인(人), 춘(春)이고, 진운목(眞韻目)이다. 기구(起句)에 압운이 없으면 기구의 마지막 자 즉 7번 자는 무조건 측성(仄聲)을 써야 하므로 숙(淑) 자를 쓴 것이다. 인터넷에서 ‘정숙(貞淑)’이 아니라 ‘숙정(淑貞)’으로 표기된 것은 오류로 보인다. 신체시가 아니기 때문에 각 구(句)의 이사부동(二四不同)·이륙동(二六同) 조건은 무시하고 지은 것이다.

어려운 시어(詩語)는 다음과 같다. 화운(化雲)은 구름같이 되는 것이다. 즉 마음이 고정되거나 안정되지 못하고 구름처럼 떠도는 것이다. 혜(兮)는 어조사로서 고시(古詩)에서 글자나 운율을 맞추기 위해 의미 없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동(洞)은 산 골짜기이다. 적막(寂寞)은 쓸쓸하고 고요한 것이다. 요초(瑤草)는 기화요초(琪花瑤草)의 줄임말로 아름다운 꽃과 풀을 말한다. 분온(芬蒕)은 향기로운 꽃이 무성한 모양이다. 장(將)은 장차이다. 내하(奈何)는 어찌하다 이다.

설요(薛瑤)는 《전당시(全唐詩)》의 소전(小傳)에 의하면, 동명국(東明國) 사람인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설승충(薛承沖)의 딸인데, 곽원진(郭元振)에게 시집가 첩(妾)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 나라 진자앙(陳子昂)이 지은 <관도곽공희설씨묘지(館陶郭公姬薛氏墓誌)>에 기록은 “희인(姬人)의 성은 설씨(薛氏)로 동명국왕(東明國王) 김씨(金氏)의 자손이다. 옛날 김왕(金王)에게 사랑하는 아들이 있어 설(薛) 땅에 봉하였으므로 성을 설(薛)로 하였다. 대대로 김씨와는 혼인하지 않았다. 그의 고조(高祖)와 증조(曾祖)는 모두 김왕(金王)의 귀신(貴臣)과 대인(大人)이고 아버지는 설승충(薛承沖)인데, 당 고종(唐高宗) 때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당 나라에 들어가니 황제가 그의 공을 찬양하여 좌무위장군에 임명했다.”이다. 역사적으로 조선반도에는 동명국은 없고, 다만 고구려의 시조가 동명왕(東明王) 고주몽(高朱蒙)이다. 동명국왕이 김씨라고 기록된 것을 나누어 보면 나라는 고구려에 해당되고, 왕이 김씨인 것은 신라에 해당한다. 아니면 금와(金蛙)가 주몽(朱蒙)을 낳았기 때문에 진자앙이 김씨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또한 설(薛)이라는 땅은 없고, 설성(薛姓)은 신라 귀족의 성(姓)이다. 당 나라 무덕(武德 당 고조(唐 高祖)의 연호) 4년(621)에 신라인 설계두(薛罽頭)가 배를 타고 당 나라에 들어갔다. 그는 당 태종(太宗) 때에 와서 좌무위 과의(左武衛果毅)에 제수되고 고구려를 정벌할 때에 주필산(駐蹕山) 아래 전투에서 전사하니 태종이 옷을 벗어 시체를 덮어주고 대장군을 제수했다. 김인문은 신라 무열왕(武烈王)의 둘째 아들이다. 나이 23세 때 당 나라에 들어갔고 고종(高宗) 때 당 나라 군사를 따라 함께 백제를 정벌하였으며, 뒤에 벼슬이 주국(柱國)에까지 이르렀고 당 나라에서 죽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추론하면, 진자앙이 말한 설승충은 아마 신라의 설계두가 아닌가 생각된다. 묘지(墓誌)의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어려서 얼굴빛이 옥과 같았고 젊어서 호를 선자(仙子)라 하였다. 15세 때 아버지 대장군이 죽자 머리를 깎고 출가(出家)하여 보수보살(寶手菩薩)을 보고 6년 동안 관심(觀心)하였으나, 청련(靑蓮)이 나타나지 않자 이에 반속요(返俗謠)라는 노래를 부르고 드디어 속세로 돌아왔다. 그리고 곽공(郭公)에게 시집왔는데, 장수(長壽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연호) 2년(693), 곧 계사년 2월 17일에 통천현(通泉縣)의 관사(官舍)에서 죽었다고 하였다. 곽원진(郭元振)은 곽진(郭震)으로 원진(元振)은 자(字)이다. 병부상서를 지냈고, 설요가 통천현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고국을 그리며 혜선사(惠善寺)에 빈소를 마련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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