送君南浦(송군남포)는 楚辭(초사)와 江淹別賦(강엄별부)에 용어로 사용되었다, 豫章記(예장기)에 “南浦亭(남포정)이 광윤문 밖에 있어 왕래하고 배를 대는 장소였다,”라 실려 있으니 당나라 때 벌써 그것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친구가 향하는 바에 이어서 눈물이 마치 실같이 흐르는 까닭을 밝힌 말이다. (‘爲報’라는 말은) 전하는 말로 알려주라고 부탁한 말이다. 친구의 凋謝(조사)함이 이것 또한 슬픈 것으로 족하다. 4구는 스스로 초췌하고 상하여 낙양의 전성시대와 같지 않아 이미 노쇠하여 돌아가기를 생각하고, 또 슬픔을 머금고 송별을 하니 참으로 눈물 뿌림을 금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한서지리지>에 하남군과 옛 진나라 삼천군이라, 한고조 유방이 이름을 낙양으로 고쳤다.
南浦(남포) : 남창의 광윤문 밖에 남포정이 있던 곳.
東周(동주) : 주나라가 견융의 침입으로 지금의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뒤의 국호. 여기서는 낙양을 뜻함.
憔悴(초췌) : 근심이나 고생으로 얼굴과 몸이 여위고 파리하다.
凋謝(조사) : 초목의 잎이 시들어 떨어짐. 차차 쇠하여 보잘것 없이 됨.
王維(왕유 699 ~ 761) : 중국 당나라의 화가이며 시인. 유마힐(維摩詰)에 연유해서 자를 마힐이라 했다. 일찍이 시문으로 유명했으나 음률에도 자세하고 비파도 잘하는 재주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여러 개의 관직을 역임 했으나 안록산의 난 때 체포되어 어려운 생활 후 숙종을 섬겨 상서우승에까지 이르렀다. 젊은 시절부터 장안에서 가까운 남전에서 망천장을 경영하여 도심지를 피해 불교에 경도하는 생활을 했다. 그래서 후세에 시중화(詩中畫), 화중시(畫中詩)의 시조로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