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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Oct 12. 2022

(4) 동토를 녹인 뜨거운 치마 속 – 예카테리나 2세

★ 18禁  역사 읽기 ★ (221012)

여류시인(女流詩人) 문정희의 시 <치마>의 내용처럼 남성들은 늘 여성의 치마 속에 호기심과 환상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간다. 그 궁금증과 환상이 없으면 인류 문명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고 종족의 번영도 기대하지 못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치마바람을 세계 일으켰던 여인 중 하나가 중국대륙의 측천무후이고, 세계 최대 영토이며 동토가 가장 넓지만 그 언 땅을 뜨거운 치마폭으로 녹인 여인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국토를 가진 나라인 러시아는 크기가 1,710만㎢ 정도로 전 세계 땅덩어리의 11.5%를 차지하고 있다. 이놈의 나라가 한때 이보다 더 큰 땅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땅 욕심이 많아서 북한도 꼬드기고, 우크라이나도 날름 집어삼키려고 한다. 소련(蘇聯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 시절에는 2,240만㎢, 러시아 제국(帝國) 당시에는 2,280만㎢였으니 그야말로 땅 부자였다. 그래도 역사상 존재했던 제일 큰 나라는 아니다. 식민지 대항해(大航海) 시대의 대영제국(大英帝國)이 가장 컸고, 다음이 몽골 제국(帝國)이 두 번째이니까 러시아는 3등이다. 한 때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하면서 동서(東西) 냉전(冷戰) 상황으로 세계를 호령했던 붉은 제국 소련이었지만, 중세나 근세 시대에까지 유럽의 열강(列强)과 왕족 끗발에서 변방의 촌놈 취급을 받았었다. 늘 차별받고, 왕실 무도회에서 까지 집단 따돌림을 받아서 그런지 열폭(劣暴)한 러시아의 표트르(재위 1682-1725) 대제(大帝)는 작심하고 서구를 모델로 개혁과 부국강병(富國强兵)에 몰두한다. 얼마나 열성이었나 하면 네덜란드의 조선소(造船所)에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손수 막일 아르바이트를 하며 기술을 습득했을 정도였다. 1697년에 250명의 사절단(使節團)을 데리고 유럽으로 떠나서 네덜란드 선원 복장을 하고 다닌 사진이 아직도 있다. 개혁과 부국을 위해 우리나라 조선의 지도자는 무슨 뻘 짓을 하고 있었을까? 서학(西學)쟁이를 잡아 죽이고, 쇄국(鎖國)을 하고, 당쟁(黨爭)이나 하면서 우물 안에서 소꿉장난이나 했었을 거다. 표트르대제의 개혁정책 덕분으로 러시아는 독일과 더불어 유럽 역사에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다. 그는 부국강병을 기반으로 오스만제국, 스웨덴 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토를 넓혔다. 이런 러시아제국을 더욱더 확고부동한 강대국으로 일으켜 세운 사람이 바로 오늘의 여자 주인공인 대제(大帝) 또는 여제(女帝) 예카테리나 2세(1729-1796)이다.

<예카테리나2세>

러시아의 황제 중 대제(大帝)로 불린 황제는 표트르와 예카테리나 2세뿐이다. 여자의 신분으로 러시아인도 아닌 독일 출신 이방인(異邦人)이 여제 특히 대제로 불리는 것은 정말 대단한 사건이다. 황후의 신분에서 황제를 퇴위(退位)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것은 중국의 측천무후(則天武后)와 비슷한 상황이다. 그러나 아들 파벨 1세와 불화로 그가 추후에는 여자는 황제에 오를 수 없도록 법을 개정하는 바람에 그녀가 마지막 여제(女帝)가 되었다. 예카테리나는 뛰어난 정치역량과 업적을 자랑하지만, 남편을 몰아내고 황위를 차지해서 그런지 이면에서는 향기롭지 못한 찬사(讚辭)가 늘 따라다닌다. 향기롭지 못한 별명이란 바로 <남자 사냥꾼>이라는 아름답지 못한 꼬리표이다. 그녀의 남성 편력(遍歷)은 측천무후와 비슷하게 60세를 넘어 죽음을 앞에 둔 순간까지도 정부(情夫)들을 접촉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의 정부(情夫)들은 A급 정예 멤버만 12명에다가 B급까지 합치면 총 80여 명이라고 한다. 그녀는 원래 러시아인이 아니고 프로이센 왕국의 군인 출신 귀족의 딸이다. 지금의 폴란드 서부와 독일 동부 지역에 위치했던 슈테틴에서 안할트 체르브스트 공작(公爵)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지극한 교육열과 본인의 총명함으로 다양한 교육을 받아서, 클레오파트라의 얼굴에 브루투스의 넋을 지닌 여인이라고 불렸다. 그녀의 본명은 소피아 아우구스타 프레데리카이고, 예카테리나는 나중에 표트르 3세가 되는 카를 울리히와 결혼하면서 러시아 정교(正敎)로 개종하면서 지은 세례명(洗禮名)이다. 예카데리나 1세는 원래 표트르대제의 정부(情婦)에서 두 번째 부인으로, 남편인 대제의 사후 궁정 혁명(革命)으로 왕위에 오른 여제(女帝)였고, 실권은 없이 단 2 년간만 왕위에 있었을 뿐이지만, 그래도 그 여제의 이름을 물려받음으로써 왕권의 정통성 계승을 합법화할 심산이 일찍부터 있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16살 때 러시아로 시집와서 황태자와 결혼해 한몫 잡은 거지만, 신혼 초 이후에는 결혼 생활에서 남편 표트르 3세와 불화(不和)가 끊이지 않았다. 순수 독일 혈통의 그녀가 러시아의 여군주가 된 내력은 이렇다. 1741년 궁정 혁명으로 러시아의 집권자가 된 엘리자베따 페트로프나 여제(이 여제는 표트르 1세의 딸)는 자식이 없어 이종질(姨從姪)인 카를 울리히를 표트르 대공(大公)을 황태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목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여제는 황태자비 간택을 프러시아 공국(公國)의 프레드리히 대왕에게 부탁한다. 프레드리히는 자기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여 아무런 친밀 관계도 없지만 왕족으로서 평범한 군대 지휘관일 뿐인 크리스티앙 아우구스타(일명 안할트 체르브스트)의 딸 소피아를 소개한다. 그는 독일 실세 가문의 딸들보다는 몰락(沒落)한 왕가의 딸을 출세시키면, 그들이 고마워서라도 그 은혜를 잊지 않고 평생 충성할 것이라 여겼을 거다. 그러면 러시아 권좌의 핵심도 좌지우지할 수 있으리라는 엉뚱한 야심도 가졌을 것이다. 또 마침 황태자인 표트르 대공의 어머니는 표트르대제의 딸 안나 페트로브나였고, 그의 아버지는 독일의 홀슈타인 고토로프 후작인 카를 프레드리히이었기에 명분도 섰다.

<표트르 3세>

혼담이 오갈 때 중매쟁이가 내사한 은밀한 존안(存案) 자료에 나타난 바로는 황태자의 이력(履歷) 사항이 형편없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황위 계승 서열 1위라는 어마어마한 카드가 있기에 모든 것은 프리 패스였다. 그래도 전해 내려오는 프로필을 일별(一瞥)하면 아래와 같다.

- 신언서판(身言書判) : 어린 나이에 조실부모한 후 당숙부(堂叔父) 밑에서 자라나는 과정에서 군대식 교육을 받았음에도 병정놀이 장난이나 좋아하는 소아병적인 스타일. 미술 작품에는 멋진 얼굴로 나오는데, 쥐와 놀다가 천연두에 걸려서 곰보의 일그러진 얼굴에 서양인으로서는 추남(醜男)에 속했다고 함. 왕위 계승자로서의 자질 교육은 딴전이고 병정놀이와 음악 미술 등을 좋아해서 신언서판만으로는 중매쟁이의 수첩에 전혀 못 올라갈 팔자.

- 지능 : IQ 수준은 그 당시 테스트를 해보지 못해서 정확하게 나온 것이 없고, 러시아 인들이 싫어하는 독일을 늘 그리워하고 그 정책을 따르려 해서 패가망신(敗家亡身)할 정도의 지적 수준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다 이겨놓은 상태에서 갑자기 어느 늙은 농노(農奴)의 하소연을 듣고 일방적으로 전쟁을 중지하고 불리한 조건의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 남녀 관계 : 예카테리나와 결혼하기 전부터 사귀던 애인 보론초바(Vorontsova)와는 그 짓을 즐겼는지 모르지만, 마누라 예카테리나와는 그 짓 하기를 싫어했다. 선왕인 엘리자베따가 후사를 잇게 빨리 아이를 가지라고 표트르3세와 예카테리나를 들볶지 않았다면 후세도 없이 끝날 수도 있었다. 어떤 때는 예카테리나가 낳은 아이가 자기 아이가 아니라고 우기기도 했다. 성격상 마누라를 봐도 흥미가 없어서 발정(發情)이 동하지 않으니, 발기(勃起)가 될 리 없고, 더욱이 발사(發射)는 꿈도 못 꾸는 상황이다. 마누라를 보면 간혹 성질 머리를 못 이겨 발작(發作)과 발광(發狂)을 하면서 두들겨 패는 등 발악(發惡)을 했단다.

- 취미 : 원숭이랑 놀기, 도시락 싸들고 불구경하기, 장난감 놀이, 병정놀이, 쥐잡기 놀이 등등이다. 정신세계가 지경이니 신부(新婦)와의 성적 접촉은 아예 관심도 없고, 또 강요에 의해 어쩌다가 신부 방에 들어와도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事)는 생각도 아니하고, 넓고 폭신폭신한 부인 침대에서 병정놀이하는 게 더 재미있었기 때문이라나 뭐라나.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전쟁 놀이터입니다’라는 당시 러시아 광고계(廣告界)에 불후(不朽)의 카피가 여기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어떤 기록에는 결혼 후 8년까지도 예카테리나는 사내놈의 손을 탄 적이 없는 처녀림(處女林)이었단다.

<루이 16세>

이와 비슷한 유형의 소아병적(小兒病的)인 왕이 프랑스에도 있었다. 루이 16세라고. 이 친구의 마누라가 저 유명한 마리 앙트와네트이다. 루이 16세도 어지간히 어벙한 놈인지 취미가 자물쇠 놀이란다. 당근 여자에게는 아예 무관심하다 못해 마누라인 앙트와네트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결혼하고 나서 왕위에 올라서도 7년 동안이나 부부관계가 없었는데, 이에 대해서 고자(鼓子)라는 등 무수한 소문이 돌았다. 이런 소문에 걱정한 루이 15세가 자신이 직접 저명한 의사를 데려다가 진찰했던 기록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성적 능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또한 당시 스페인 대사의 보고에서도 성적 불구는 아닌 것 같다는 내용도 확인된다. 즉, 결혼 초기에 자식이 없었던 것은 본인이 부부관계를 피했기 때문일 거다. 자물쇠 놀이를 하면서 열기 힘든 복잡한 자물쇠는 잘도 열면서, 치마끈만 풀면 저절로 열리는 마누라의 자물쇠에는 열쇠를 들이대지 않으니 문제였다. 그러자 결국 앙트와네트는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을 수 없어 음란(淫亂) 방탕(放蕩)의 길로 접어들고, 종국에는 프랑스혁명의 도화선(導火線)이 되어 스스로 파국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불가능 : 스포츠조선 자료>

이왕 프랑스 얘기가 나온 김에 괴이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하면 바로 나폴레옹에 관한 거다.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고 외치며 유럽 대륙을 휘저었던 나폴레옹 황제 말이다. 요즘에는 처량하게도 브랜디 술병 모델이나 시골 이발소의 철 지난 그림 모델로 전락됐지만 그래도 한때는 얼마나 대단한 영웅이었는가? 그런 그에게도 "불가능"이란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어쩔 수 없이 요지부동인 거시기 크기였다. 나폴레옹은 키도 작고 거시기도 작다고 그를 모셨던 부관들은 말한다. 특히 침실 담당 전속부관은 말했다. “나폴레옹은 무척 호색한이었으며, 아무리 전쟁터라 하더라도 맘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반드시 같이 잠자리를 해야 즉성이 풀렸습니다. 그러나 거시기가 작아서 늘 고민을 하였습니다.”라고.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하여 엘바섬으로 유배(流配)되었다가, 다음 해 파리로 돌아와 황제에 즉위하였다가 그 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여 영국에 항복하고, 대서양의 고도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비밀에 싸인 그의 죽음의 원인을 밝히기 위하여 부검(剖檢)이 실시되었다. 위암, 비소(砒素) 중독, 독살설, 영양부족 등 그의 죽음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이 난무(亂舞)하고 있다. 죽음의 원인은 현재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의 시신은 공교롭게도 그가 태어난 코르시카로 옮겨져 부검이 실시되었는데, 1821년 부검 때 주치의 앙통마르시가 나폴레옹의 성기(性器)를 몰래 잘라냈는데, 그 성기가 코르시카의 성직자 비그날리 신부에게 넘어가 비밀리에 빼돌린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나폴레옹의 성기는 어디로 가 있는지 몇 년 동안 행방이 묘연했는데, 갑자기 1921년 뉴욕 맨해튼박물관에 전시품(展示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우연히 이 박물관을 방문하여 전시품을 감상하던 래티머 박사의 눈에 진귀(珍貴)하고 신기(新奇)하며 신비(神祕)한 물건이 들어왔다. 그는 박물관장에게 “내가 저 물건을 사겠소. 얼마면 되겠소?”박물관장이 말했다. “그 뭐 3000달러는 줘야 되지 않겠소.”이리하여 길이가 약 4㎝ 인 이 물건은 1977년 미국 컬럼비아 의대 비뇨기과 의사 킹슬리 래티머 박사가 3,000달러를 주고 구매했단다. 래티머 박사는 자신의 침대 밑에 나폴레옹의 성기를 보관해 오다가 몇 년 뒤에 죽었단다. 래티머 박사가 죽고, 그의 손녀가 나폴레옹의 성기를 상속받았다. 그녀는 <나폴레옹 성기 경매, 가격 10만 달러 이상>이라고 집 앞에 간판을 내걸고 구매자를 찾고 있는 중이라는 외신 기사가 있다. 황당하게도 나폴레옹의 거시기를 사려고 개미떼 같이 인파가 모여들고 있다고 외신들이 앞 다투어 전했다. 경매에 나온 잘 건조된 성기가 4cm라면, 건조 시 부피가 반으로 줄어든다고 가정할 때 실물 상태의 크기가 대체로 9cm 미만으로 볼 수 있으니 서양인 치고는 작다고 판단할 수 있겠다. 침실 담당 부관의 증언이 대체로 맞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영구 땡칠이의 유머가 있는데 이를 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영구(영원한 9㎝), 땡칠(땡겨야 7㎝), 수오(수술해서 5cm), 영삼(영영 3cm), 세일(세워도 1cm) 이름과 거시기 크기에 대한 Y담(談)인데, 이름 지을 때 잘 살펴야겠다. 이런 뻔데기 거시기의 나폴레옹은 당연히 밤이면 밤마다 마누라인 조세핀에게 핀잔을 들었을 게 뻔하다.  조세핀은 겁나게 색을 부리고, 한없이 밝히는 여자로 소문난 여자다. 어느 정도냐 하면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로 출정하자마자 남편의 전속부관(專屬副官)과 러브호텔을 전전(輾轉)할 정도다.  나폴레옹이 전쟁 중에도 조세핀에게 급전(急電)을 때리면서 "조세핀, 조세피나도록 보고 싶어. 빨랑 내 곁으로 와줘"라고 애원했단다. 조세핀은 할 수 없이 이탈리아로 면회를 간다.  그런데 전장(戰場)의 나폴레옹에게 위문품(慰問品)으로 나폴레옹 코냑 정도의 선물을 가져가야 되는데, 도리어 애인인 부관(副官)을 데리고 가서는 나폴레옹이 예약해 놓은 방 바로 옆방에 애인을 묵게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더블데이트를 즐겼단다. 대담하고 대단하다.

서방(書房)인 표트르3세로부터 대우받지 못한 예카테리나는 허구한 날 독수공방(獨守空房)하다가는 가슴에 열불이 나서 제명에 못 살 것 같다고 생각하고, 마음과 몸이 이끄는 데로 살기로 작정한다. 그래서 드디어 남자 사냥을 시작한다. 그녀는 독일인으로서 러시아말과 풍습, 정치 감각 등을 익혀서 요조숙녀(窈窕淑女)로 살았지만, 지금부터는 완전 190도 달리 살기로 결심한 거다. 즉 ‘뼈와 살이 식은 밤’에서 ‘뼈와 살이 타는 밤’, ‘뼈와 살이 녹는 밤’으로 완전 급선회(急旋回)하게 된다. 그녀의 뼈와 살을 태우고 녹여주는 정부들 중 정예(精銳) 멤버들을 간추려서 소개해 보자.


1. 세르게이 살티코프(Sergei Saltykov 1726~1763)

  이 친구는 여왕 시녀(侍女)의 남편이며 궁정 관리인으로 허우대 그럴듯한 유부남이다. 원래 예카테리나가 러시아로 시집올 때, 마차 전복(顚覆) 사고로 위험에 처했다. 이때 이 친구가 나서서 목숨을 구해주자 마음속으로 멋진 인연(因緣)으로 느꼈는지 모른다. 7년 독수공방에 지친 예카테리나는 남편 표트르가 사냥을 나가 집을 비운 사이 살티코프와 둘이서 처음 만난 마을로 밀월(蜜月) 여행을 떠난다. 그는 유부남답게 침대 필드에서 야간(夜間) 경기를 펼칠 때 스트레이트, 드로우, 훅 샷은 기본이고, 로브 샷, 칩 샷, 절묘한 백스핀까지 맘먹은 대로 구사하며 예카트리나를 녹였다. “어긔야 어강됴리..... 그녀의 눈앞에 별천지가 무지개처럼 피어나는 도다. 아흐 다롱디리” 그녀는 새로운 신세계를 열어준 그놈과 매일 운우지정(雲雨之情)과 남녀희열지사(男女喜悅之事)를 즐기며, 색기발랄(色氣潑剌)한 목소리로 복에 겨워 연신 시일야방사대곡(時日夜房事大曲)을 읊었다. 무심(無心)한 서방만 바라보면 보내 세월이 한스러워 살티코프의 살이 타고 코피가 흐르도록 그에게 탐닉(耽溺)했다. 황태자비의 체면 따위는 접어둔 채 밤마다 그놈에게 매달리던 그녀에게 태기(胎氣)가 있자, 여왕이 이놈을 외교관이라는 직함을 주어서 국외로 추방(追放)해버린다. 출산한 아이는 자기의 후계자인 표트르3세의 아이로 선언(宣言)하고 손자인양 키우면서 함구령(緘口令)을 내린다. 예카테리나는 아이를 낳고도 손수 키우지도 못했다. 아마 그 당시 러시아는 후진국이라서 콘돔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서 이런 유형의 사생아가 많이 태어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콘돔의 발명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설(正說)이 없으나 고대부터 사용되었다는 것이 설이 있다. 프랑스 콩바렐의 동굴 벽화와 고대 이집트의 그림에는 콘돔을 착용하는 남성들이 묘사(描寫)되어 있다고 한다. 기록상으로는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가브리엘 팔로피오(1523~1562)가 쓴 성병 매독(梅毒)에 관한 논문 「프랑스 질병」(1564)이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는데, 여기에 콘돔에 대한 기록이 있다. 문란(紊亂)한 성관계로 인한 성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팔로피오는 린넨으로 만든 성기 덮개를 발명했는데, 이것을 소금 용액에 담갔다가 착용하고 성관계를 맺으면 일종의 보호막(保護膜)이 형성되어 성병 전염을 차단했다고 한다. 성병의 위험도 있지만 거추장스러운 기구(器具)를 장착하는 걸 꺼리는 여성들의 호감(好感)을 얻기 위해 핑크색 리본으로 묶어서 고정했다니 가히 제품의 품질을 짐작할 수 있겠다. 팔로피오는 이 기구를 사용한 1,100명의 남성 중 어느 누구도 매독에 걸리지 않았다고 그 논문에서 주장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콘돔은 린넨에서 기름종이(油紙), 얇은 가죽, 동물의 내장(內臟)이나 방광(膀胱), 물고기 부레, 심지어는 거북이 껍질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1844년경에 미국의 화학자이며 발명가인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가 고무의 경화(硬化) 공법에 대한 다양한 특허를 고안했는데, 요즘 같은 고무로 된 콘돔을 최초로 발명했다. 굿이어 타이어는 그의 발명 공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자동차 타이어를 만든 것이다. 이 사람이 라텍스 콘돔을 발명하지 않았다면 세계 인구가 급증하였을 것이고 성병으로 죽은 사람도 급증했을 것이다. 그래서 영국의 극작가(劇作家) 버나드 쇼는 “고무 콘돔은 19세기 가장 위대한 발명”이라고 했다.

<포니아토프스키>

2.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August Poniatowski : 1732~1798)

예카테리나의 첫 정부(情夫)가 추방당하자 그녀는 밤마다 은장도(銀粧刀)로 허벅지를 찌르면서 살 수가 없음을 단번에 깨닫고 다음 타자를 물색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러시아 궁정에 머물던 포니아토프스키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비밀 고백 편지를 보내자 단번에 2번 타자로 등극(登極)한다. 그는 원래 폴란드 백작(伯爵) 출신인데, 1752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755년 러시아 제국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자리에서 예카테리나를 만나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육체의 맛에 눈을 뜬 그녀는 이제 자신에게 관심을 안 갖는 남편을 안중(眼中)에도 두지 않고 대담무쌍하고도 질펀 철퍽한 애정 행각(行脚)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녀의 총애(寵愛)를 받던 포니아토프스키는 남의 나라에 있으면서 유력한 여인의 기둥서방 노릇이나 잘할 일이지 뭐 잘 났다고 외교 관계에서 적국의 앞잡이 노릇하며 촐싹대다가 발각된다. 1758년 엘리자베타 여제가 이를 알고 간첩(間諜) 혐의(嫌疑)를 씌워 폴란드 본국으로 추방한다. 예카데리나는 황제가 된 후 1764년에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미운 정과 애정(愛情), 육정(肉情), 욕정(欲情)이 얽힌 그놈을 폴란드왕으로 취임시켜 준다.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의 마지막 왕으로 정치적으로는 능력이 없어서 폐위(廢位) 당하였지만, 바르샤바의 가장 크고 좋은 공원인 와지엔키를 남겼다. 와지엔키 공원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 중의 하나로 바르샤바의 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공원의 이름인 ‘와지엔키’는 목욕탕이라는 뜻이다. 당시 이 지역은 귀족들의 수렵장(狩獵場)이었는데 수렵을 마친 후 이곳에서 목욕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 지어진 것이다. 물과 건물, 조형물, 많은 꽃과 나무들로 장식되어 있는 73만 평방 m의 와지엔키 공원 안에는 악상을 떠올리고 있는 모습의 쇼팽 기념 동상이 있다. 쇼팽 동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가 폴란드인의 정서가 함축되어 있다 하여 독일로 가져가 머리만 남기고 제철소에서 전부 녹여 버린 것을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찾아와 복구해 놓았다고 한다. 매주 일요일 정오이면 쇼팽 콘서트가 열린다고. 폐위당한 포니아토프스키는 상트페테르브르크에 유폐되어 연금을 받으며 살다가 죽었다.

<김정은이 탄 백마 - 조선중앙통신>

3. 그리고리예비치 오를로프 백작(Count Grigory Grigoryevich Orlov : 1734~1783)

예카테리나의 세 번째 불륜(不倫) 상대는 황실 근위대의 장교인 오를로프 백작이다. 그는 권신(權臣) 슈발로프의 정부(情婦)를 건드린 죄로 옥에 수감되었을 때 예카테리나가 구해주었다. 그것을 계기로 오를로프 형제들은 예카테리나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형이 그녀의 새 애인이 된다. 그리고 이들은 예카테리나가 황제로 등극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는 행동 대장 역할을 한다. 형이 그리고리예비치 오를로프,  동생은 알렉세이 오를로프다. 이 친구는 종전의 야들야들한 2번 타자와는 달리 군인 출신이라서 그런지 힘, 용모, 관능으로 똘똘 뭉친 놈이었다. 친위 쿠데타의 최고 공신(功臣)이라지만 그녀와의 관계가 무려 10년 넘게 지속됐을 정도니 그놈의 밤무대 실력을 가늠할 수 있겠다. 과연 테크닉만으로 이 정도의 기간을 커버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호사가(好事家)들은 오를로프의 코가 주먹 보다 더 크기 때문에 그의 초대형 드라이버를 무기로 여제를 완전히 힘으로 누르고, 초대형 장총으로 종횡무진 휘둘러서 녹신녹신하게 녹여버렸다는 전설도 있다. 그의 힘을 비유해서인지는 몰라도 러시아산 말과 닭의 품종 이름에 오를로프가 있다. 근래에 북한 김정은이가 백마(白馬)를 타고 백두산에 올라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그 백마가 바로 러시아산 오를로프 종마(種馬)이다. 닭도 크고 힘세게 보이는 러시아산 오를로프 품종이 맛있어 보인다. 남자는 역시 힘으로 거대한 드라이버 장타(長打)를 팡팡 내질러야지 얍살하게 쓰리온시키는 숏게임은 폼이 나지 않는다.

<오를로프 백작>

예카테리나가 오를로프의 코를 보고 골랐는지는 모르지만 떠도는 설화(說話)에 코를 보고 남자를 고른 여왕이 한 명 더 있다. 우리나라의 심청전에 ‘뺑덕어멈 코 큰 총각 떡 사주듯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서양에서도 그런 속설(俗說)을 믿었던 모양이다. 이집트에도 남자의 음경(陰莖)은 코 길이로 알 수 있다는 속담(俗談)이 있다. 이 속담을 굳게 믿은 나폴리 왕국의 여왕 요한나 1세(1326-1382)는 코끼리의 코에 버금가는 가장 큰 코를 가진 남성 안드레이를 배우자로 맞이하였다. 하지만 첫날밤 엄지손가락에 불과한 신랑의 작은 심벌에 실망해서 견디지 못하고 결국 그를 살해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왕궁을 떠나 아비뇽에 있는 가족 영지(領地)에다 유럽 최고의 화려한 매춘굴(賣春窟)을 개업한 뒤 돈도 벌고, 욕정도 원 없이 채우며 지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역사책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신라(新羅) 제22대 지철로왕(智哲老王) 즉 지증왕(智證王) 음경(陰莖)이 대물(大物)이란 기록이 있다. 왕의 음경이 길이가 한자 다섯 치여서 좋은 짝을 찾기가 어려웠으므로 사신을 삼도(三道)로 보내 구하였다. 사신이 모량부(牟梁部) 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이르렀을 때, 개 두 마리가 북만한 크기의 똥 덩어리의 양쪽 끝을 다투어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묻자, 한 소녀가 이렇게 말하였다. “모량부 상공(上公)의 딸이 그곳에서 빨래를 하다 숲 속에 숨어서 눈 것입니다.”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상공의 딸의 신장(身長)은 7척 5촌이나 되었다. 이런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왕이 수레를 보내 그녀를 궁궐로 맞아들여 황후(皇后)로 봉하니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였다.


전 세계 비뇨기과 의사들의 남성의 성기(性器) 크기에 대한 팩트 체크 결과 코, 신장, 발, 얼굴 모양 어느 것도 그것의 크기와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가천의대 길병원 김태범 비뇨기과 교수팀의 조사결과는 학계에서 자체적으로 검증(檢證)을 해본 결과 아주 정확한 음경(陰莖)의 길이가 나왔다고 한다. 내용은 검지(둘째 손가락)보다 약지(넷째 손가락)가 길수록 음경 길이가 길다는 연구 결과이다. 김태범 교수팀은 손가락 길이만 측정해서 크기를 계산할 수 있는 공식(公式)까지 만들어 제시했다. 즉 음경의 길이(음경을 잡아당긴 상태에서 치골恥骨 뼈로부터 귀두龜頭 끝 부분까지) = -9.201 × (검지 길이 ÷ 약지 길이) + 20.577이다. 이 공식에 맞춰 음경을 측정해 본 결과 정확한 측정치가 나와 놀라웠다. 남성 독자들은 화장실에 자를 가져가서 몰래 검증(檢證)해보기 바란다.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코가 큰 남자들이 음경(陰莖)도 크다고 알려져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둔다. 여성들이여, 남성의 음경(陰莖) 크기가 궁금하다면 코보다는 남자의 손을 보여 달라고 해보라. 두 번째 손가락보다 네 번째 손가락이 길면 길수록 음경(陰莖)도 아주 길고 큰 남자일 가능성이 높다. 속설(俗說)과 달리 코가 큰 놈은 콧구멍만 크기 때문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연구 보도가 있다. 세계남성건강저널(World Journal of Men’s Health)에 따르면, 미국 스탠퍼드 대학과 이탈리아 산 라파엘 병원 등 연구팀은 지난 2021년 측정한 남성의 발기(勃起)된 음경(陰莖) 길이가 1992년 측정한 발기된 음경 길이보다 24% 길어졌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1942년부터 2021년 사이에 출판된 남성 음경에 관한 75편의 연구 논문에서 전체 참가자 5만 5,761명을 비교·검토했는데, 이를 토대로 메타 분석을 진행한 결과, 최근 30년간 전 세계 각지(各地) 남성 발기(勃起) 상태의 음경은 평균 12.27cm에서 15.23cm로 24% 길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음경(陰莖)이 길어진 이유에 대해선 환경 호르몬 영향 등이 꼽혔다. 아울러, 남성의 사춘기(思春期) 시작 연령이 빨라지고 있는 점과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점도 음경 길이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팀은 “음경 길이의 변화는 남성(男性) 호르몬을 파괴하는 화학)化學) 물질의 증가, 성조숙증(性早熟症), 비만율, 좌식(坐式) 생활 등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며 “인간의 중요(重要)한 신체 부분인 생식기(生殖器)가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것에 대한 원인을 밝혀내는 데 노력해야 한다.”라고 전했다. 남성 거시기가 커지는 게 남성에게 다행인지, 여성에게 다행인지는 독자 여러분들이 판단하기 바란다.


각설(却說)하고, 세월이 흘러 남편 표트르 3세가 황제로 즉위한다. 황제는 즉위 기념 파티장에서 보드카 폭탄주(爆彈酒) 몇 잔 마시고는 참석자들 다 듣도록 이렇게 큰소리친다. “예카테리나 저 년이 낳은 아이는 모두 내 씨앗이 아니야.”이에 격분한 예카테리나는 그동안 비밀리에 공작(工作)을 꾸며 놓은 계획으로 남편을 아예 제거하기로 작정한다. 경호부대의 최측근 핵심인 그녀의 애인 오를로프와 쑥더쿵 음모를 꾸민다. 그녀에게 무르팍에 피멍 들도록 봉사한 덕에 그 자리에 올라간 거지. 예카테리나는 오를로프가 지휘하는 친위대(親衛隊)를 앞세워 황제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여황제로 등극(登極)을 한다. 남편은 쇼르셀베르크 요새 감옥에 보내자, 3주 후에 뇌졸중(腦卒中)으로 급사한다. 이 감옥은 정치범과 흉악범들만 가두고, 고문으로 악명 높은 공포의 지옥이었다. 지병(持病)인 뇌졸중으로 사망했음을 공표하지만, 아무도 믿는 자는 없었다. 역사가들의 견해는 표트르3세가 올르로프의 동생에게 독살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시이모(媤姨母)인 직전 여왕 엘리자베따 파블로브나(1741-61)에 의해 이미 여섯 살 때부터 16 년간을 햇빛 한번 안 드는 감옥에 유폐(幽閉) 당해 있던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 이반 6세를 찾아내 독살해 버린다. 마지막 남은 아들 파벨이 장성하여 아버지인 표트르 3세의 죽음에 대한 진상(眞相)을 물을 것에 대비해서 아들마저 제거해야 할지 괴로움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권력은 이토록 비정(非情) 한 것이런가.


오를로프는 이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너무 기고만장(氣高萬丈)하다. 간이 배 밖에 나온 이 놈은 겁도 없이 그녀에게 결혼 신청을 한다. 그러나 황제까지 된 마당에 그녀가 어디 한 남자로 만족하겠는가? 부킹하자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남자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부산까지 줄을 설 텐데. 자기를 왕위에 추대한 일등 공신이며 동시에 정부(情夫)인 오를로프의 숨은 야심(野心)을 간파(看破)한 그녀는, 그가 늙었다는 이유로 더 이상 침실 접근을 막고 외국으로 내보낸다. 그녀는 절대로 공식적인 결혼을 않고 가문의 지체나 지위의 높낮이와는 관계없이 오직 침실에서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정력 좋은 젊은 사내 사냥을 늙도록 끊임없이 했다. 바지르키코프, 궁정 관리인인 프라토츠보프, 이 둘은 그녀가 늙어서 사냥한 젊은 사내들이었다. 왕의 자질은커녕 사내구실 조차도 제대로 못하는 표트르 대공에게 시집와서 탄식으로 흘려보낸, 맺히고 쌓인 한 많던 젊은 세월을 복수라도 하듯이. 그녀는 침실에서 자기를 만족시켜 주는 연인(戀人)들에게는 항상 거액의 돈, 저택과 농지, 그리고 금은보화를 아낌없이 선물로 주었다. 현금만 1 억 루블이 넘었다고 한다. 당시 유럽의 귀족사회는 우리들이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낭만(浪漫)과 이성(理性)이 넘치는 그런 멋진 곳이 절대 아니다. 그 이면(裏面)은 온갖 추악한 음모(陰謀)와 변태적(變態的) 애정이 도사린 소굴이었다. 특히 먹물깨나 먹고 방귀소리 높은 잘난 남녀들이 더 깽판을 쳤다.


14세기 프랑스에서의 해괴한 사건을 예로 들겠다. 당시 항간에는 밤마다 젊은 청년들이 실종되고 있다는 괴소문(怪所聞)이 돌았다. 급기야 ‘실종·의문사 진상조사 위원회’가 결성이 되고, 검경합수부(檢警合搜部)가 구성되어 수사를 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섹스에 굶주린 여자 두 명이 밤에 남자를 납치해 밤새 자신들의 육욕(肉慾)의 제물로 데리고 놀다가 살해한 뒤 강에 버린 거다. 더더욱 경악(驚愕)스러웠던 것은 그 여자들의 신분이 바로 루이 14세의 왕비와 샤를 4세의 왕비였다. 결국 이 두 여자는 1314년 체포돼 감옥에 유폐된다.  16세기 프랑스의 카트리느 왕후의 잔혹(殘酷)도 이에 버금간다. 14살 때 앙리 2세와 결혼한 이 여자는 남편의 바람기에 한을 품는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23년 동안이나 이 여자는 방치돼 있었다. 결국 카트리느는 동성애에 끝없는 탐닉을 하게 된다. 그러다 남편 앙리2세가 사고로 죽자 재빨리 왕권을 잡고,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신교도들을 대학살 해 버린다. 1572년에 2만~10만 명을 대학살 하는 악명을 떨친 배경에는 그녀의 억눌린 성적욕구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포템킨>

4.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 포템킨(Grigory Aleksandrovich Potemkin 1739~1791)

이놈은 4번 타자로 등극하여 17년 동안이나 여황제와의 관계를 지속한다. 미남에다가 수재(秀才)였다고 전해지는 이놈을 여제(女帝)는 매우 총애했다. 자기 침실 바로 아랫방에 포템킨의 방을 만들고 비밀계단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비밀통로를 이용하여 남에게 들키지 않게 향락을 즐겼단다. 하지만 공사한 인부들이 다 누설해서 비밀은 없다. 요즘도 가정집이나 오피스텔은 불법개조 하여 성매매를 하는 것처럼 불법개조의 역사가 깊다. 포템킨이 유명해진 건 그녀의 오랜 기간 정부(情夫)였다는 사실 외에도 그놈이 나중에는 그녀의 뚜쟁이 노릇을 했다는 데 있다. 그녀가 자기에게 슬슬 싫증을 내는 기색을 보이자 머리를 돌린 이놈이 뚜쟁이 노릇을 자청하고 나선다. 그녀가 좋아할 만한 섹시한 놈들을 골라 바치는 거다. 그러고는 그 광경을 비밀리에 지켜봤을 수도 있다. 요즘 같으면 몰카를 설치하여 동영상으로 촬영했을 텐데. 그런데 이 친구는 그냥 아무렇게나 식단(食單)에 올리는 게 아니다. 채홍사(採紅使)였다면 자기가 그 꽃을 먼저 시식(試食)을 해보면 될 테지만, 싱싱한 고추를 진상(進上)해야 하니 시식도 못하고 대략 난감(難堪)했다. 그래서 의사로 하여금 육체적 결함이 있는지 테스트시키고, 비서로 하여금 성격, 교양, 매너 등을 면접고사를 보고, 시녀로 하여금 섹스 테크닉이 어느 정도인지 실습 점검했다고 한다. 그는 애인 중 가장 많은 재화를 선물로 받았다. 그는 터키와 싸워 러시아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킨 일등 공신으로서, 여제의 과분한 선물에 감격하여 목숨을 바쳐 싸워서 크림 반도의 코카서스 지방과 흑해 지역을 병합하여 상납한다. 그러면서 그는 내심 사랑보다 오히려 권력 쪽에 야망을 두었던 사람이다. 나라의 거대한 땅덩이를 그들은 침실에서 정사(情事)를 즐기며 아이들이 소꿉장난하듯 땅따먹기를 하였다. 어쨌거나 알아서 착착 기는 기특한 포템킨을 극진히 도 아꼈는지, 그놈이 터키와의 전쟁 후에 조약 체결 과정에서 사망하자 세 번이나 여황이 졸도(卒倒)했다고 한다. 그놈은 살아서는 여제를 침대에서 기절시키더니 죽으면서는 멀리 떨어져서도 기절시키더라는 전설이 있다.


포템킨이 죽은 뒤 여제는 한동안 삶의 의욕을 잃은 듯했으나, 음행(淫行)은 거의 막가파 수준으로 극을 달리기 시작한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품위 있게 먹물깨나 먹은 놈들만을 상대했었는데, 이제는 인물 좋고 힘이 넘치는 놈이면 천민(賤民)과의 잠자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멀쩡한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려서 침실로 데려오기도 한다. 그 당시 러시아에는 ‘절름발이는 그게 세다’는 속설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얼마나 난잡했으면 그녀의 손자인 니콜라이 1세조차 훗날 그녀를 일컬어 "왕관(王冠)을 쓴 창부(娼婦)"라고 비난했을 정도다. 독일 출신인 그녀는 독일남자를 제쳐놓고 러시아 남자들을 특히 사랑했다. 다른 어떤 유럽 남자들보다 러시아 놈들이 남성적인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위의 주요 인사를 제외하고, 그녀가 사랑을 나눈 남성 편력(遍歷)에 기록된 유명한 사람들만 대충 뽑아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알렉산드르 세미오노비치 바실치코프(Alexander Semyonovich Vasilchikov 1744~1813)는 포템킨 다음에 15세 연상의 여제를 만나서 그녀의 포로가 되었다. 테크닉이 시원치 않아서 인지 자기보다 5살 늙은 남자에게 그녀를 빼앗기고 말았다. 백작 표트르 자바도브스키(Pyotr Zavadovsky 1739~1812)는 36살의 유부남이었는데 10살 위의 여제와 육체의 향연(饗宴)을 2년간 열었다. 시메온 조리치(Semyon Zorich : 1745~1799)는 32살인 1777년에 여제를 만나 사랑을 불태웠지만 채 2년을 넘지 못하고 소리 없이 사그라졌다. 이반 림스키 코르사코프(Ivan Rimsky-Korsakov 1754~1831)는 이름이 러시아 유명 작곡가(作曲家)와 같지만 동일인이 아니다. 그는 26살인 1780년에 여제에게 간택(揀擇)되어 4년간 사랑을 나누었지만 불행하게도 혼자 여심(女心)을 독차지한 게 아니라 자기보다 4살 어린 란스코이랑 3각 관계를 형성했다. 알렉산드르 란스코이(Alexander Lanskoy 1758~1784)는 22살의 꽃다운 나이에 53살의 왕성한 여제에게 걸려 4년간 밤마다 봉사하다가 그 자리를 어몰로프에게 물려줘야만 했다. 알렉산드르 어몰로프(Alexander Yermolov 1754~1834)는 31살 때, 56세인 예카테리나의 정부가 되어 더 젊은 드미트리예프-마모노프에게 빼앗기기 전까지 2년간 그녀를 만족시켰다. 백작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예프-마모노프(Alexander Dmitriev-Mamonov 1758~1803)는 28살인 1786년에 57세인 여제를 만나서 3년간 사랑을 나누다가, 여제가 젊고 핸섬한 플라톤 주보프에게 눈을 돌리자 한 방에 차이고 말았다. 백작 플라톤 주보프(Platon Zubov 1767~1822)는 마지막으로 맞이한 섹스 파트너였다. 그녀의 손자뻘밖에 안 되는, 무려 사십 년 연하(年下)의 사내였다. 그녀 나이 환갑에 22살짜리 핸섬 미남을 정부로 맞아 죽을 때까지 7년간 데리고 놀았다. 이들을 잘 살펴보면 2~30대의 젊은 남자로 2~5년 정도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포템킨은 17년간이나 지속되었으니 대단하고 할 수 있다. 늙어갈수록 그녀의 미각(味覺)과 성격이 변화무쌍해졌다고 보인다.

<영화 포스터>

참고로 성(性)에 관한 여담(餘談)이다. 인종 간에 여러 차이가 있지만 이 방면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아라비아인들 거시기가 가장 장대하고, 왜(倭)놈들이 가장 왜소(矮小)하단다. 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성관계 연간 횟수 1위 국가는 미국으로 평균 140회, 최저국가는 일본으로 평균 40회. 일본의 게이샤들을 상대로 경험상 가장 센 놈들 특징을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단다. 그녀들이 대답한 신체적 특징은 이렇단다. 팔자 눈썹이고, 눈이 작으며, 딸기코에 목소리가 쇳소리를 내며, 몸에 털이 적다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또 게이샤들은 남자들의 성능을 1두(一頭), 2온(二溫), 3강(三强)으로 순서를 매겼단다. 1두(頭) 즉 역시 머리가 커야 좋다고, 요즘 골프 드라이버 헤드 크기가 자꾸 커지는 이유이다. 2온(溫)은 골프의 투온이 아니라 후끈후끈하고 뜨거워야 좋은 장비(裝備)이다. 3강(强)은 골프채 샤프트의 강직도(剛直度)이다. 골프채 샤프트 강도는 L < A < R < SR < S < X 순인데, 최소한 SR이나 S정도 되어야 명함을 내밀 수 있고, X라면 최고의 상품이다. 절정의 마무리 타는 강직도에서 결판이 나니까.


예카테리나는 세계사를 통틀어 성욕(性慾)과 음행(淫行)의 대표적 존재로 낙인(烙印) 찍힌 그녀지만, 그녀의 재위기간 중 러시아는 여러 면에서 비약적(飛躍的) 발전을 한다. 표트르대제도 이룩하지 못했던 흑해(黑海) 방면의 영토 확장에 성공했고, 해군력 증강에 혜안(慧眼)을 가져 흑해 함대를 창설했다. 러시아 최초의 연극 상설극장을 개설하여 오페라의 전성시대를 열었고, 볼테르 등 계몽주의(啓蒙主義) 사상가와도 교류를 가진 계몽군주로서도 유명했다. 또한 동방(東方) 진출에 심혈을 기울여 알래스카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예카테리나, 그녀는 솔로몬을 찾아온 스바 여왕도 아니고 안토니오를 뇌쇄(惱殺) 시킨 클레오파트라도 아니었다. 권력의 정상(頂上)에서 속옷 갈아입듯 측근의 사내들을 멋대로 주무른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랑 같은 부류였다. 조르즈 상드가 그녀의 예술적 재능의 향기로 뭇 사내들을 유혹(誘惑)했다면, 예카테리나는 권력의 무한한 힘으로 사내들을 희롱(戲弄)했던 것이다. 상식을 뛰어넘은 그녀의 대담무쌍(大膽無雙) 했던 호사와 방탕의 흔적들은 지금도 물증으로 산재해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대관식에 참석키 위해 성 페테르스부르그에서 모스크바의 우스펜스키 사원으로 향해 사흘 낮 동안을 말을 바꾸어 가면서 달렸던 마차(그 마차는 애인 그레고리 오를로프가 선사한 것이었다), 또 그녀가 대관식 때 입었던 허리가 잘록하고 황금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대례복(大禮服),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그린 타피스트리 작품들이 우스펜스키 사원 가까이에 있는 크렘린 무기고에 지금도 원형 고대로 손상됨이 없이 보관되어 있단다. 당시 수도는 성 페테르스부르그였으나 황제의 대관식만은 전통에 따라 모스크바의 크렘린에서 행해졌던 것이다. 영웅(英雄)이 호색(好色)하다고 여걸(女傑)도 호색(好色)인 모양이다. 예카테리나의 겨울 궁전은 그녀가 외국의 그림들을 사 모으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왕실 박물관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전문 그림 수집상까지 따로 두고 서유럽 각국으로부터 많은 미술품들을 사 모았다. 심지어는 상인들에게서 받는 세금을 그림으로 대신 받기도 했으며,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와 디드로의 조언(助言)에 따라 수집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치세 동안 약 4,000 여 점이 모여졌는데, 이것이 에르미따쥐 미술관의 효시(嚆矢)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역대 제왕들이 예술품을 사 모으고 외국으로부터 선사받은 것들을 맡겨두게 되자 소장품은 늘어났고 볼셰비키 혁명 후에는 개인 소장품들도 징발하여 지금의 규모가 되었다. 징발된 것 중에는 마티스와 피카소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독일군의 봉쇄 때는 박물관 보호를 위해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고 한다. 주요 소장 화가들도 다양하여 라파엘, 다빈치, 티타안 등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에서부터 반다이크, 루벤스, 렘브란트, 르누아르, 마티스 등의 작품, 미켈란제로나 로댕의 조각, 그리고 가구, 도자기, 태피스트리, 파이앙스라고 불리는 프랑스식 채색 도기, 아예 건물을 이루고 있는 천정, 벽면, 기둥 모두가 우랄 지방에서 캐낸 말라카이드(孔雀石) 등 준보석들로 다듬어진 것들이라 실로 찬탄할만하다. 이처럼 크고 화려한 미술관의 이름이 프랑스어로 외딴집, 은둔처(隱遁處)라는 뜻인 에르미따쥐(Hermitage)였다.

<에르미따쥐 박물관 - 시사포커스 자료>

예카테리나는 이 왕실 박물관에서 연극, 시 낭송, 댄스 등을 즐겼지만 실상은 그보다 고독을 더 즐겼다고 한다. 얼마나 고독한 여자였으면 그토록 많은 사내들을 바꾸면서도 만족을 몰랐을까? 그리고 이 수많은 예술품들을 남들에게 보여 주기도 싫어했다니 무슨 심사였을까? 심지어는 "나와, 내 생쥐가 보기 위해서" 그림을 모았다고 했다니. 그리고 2 층에 방 하나를 택해, 자신만이 쉴 수 있는 공간을 삼고 혼자서 조용히 쉬는 곳이라 해서 이 건물을 은둔처, 즉 에르미따쥐라 불렀다. 은둔처를 찾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남편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簒奪) 한 것이 이 여인의 운명이었던지, 아무튼 그녀는 치적(治積) 면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하여 스스로 피터 대제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과시할 목적으로 세운 러시아 최초의 동상이 바로 이 피터 대제를 기념키 위한 〈청동의 기사〉였다. 그녀가 러시아를 위해 남긴 업적은 지대하다. 피터 대제의 정치를 이어받아 러시아를 막강한 권력의 중앙집권적 강국으로 성장시키고 영토를 확장했다. 자원의 보고(寶庫) 알래스카를 단돈 720 만 달러에, 그것도 미국에다 팔아넘긴 황제(알렉산드르 2세)에 비하면 불세출(不世出)의 여걸(女傑)이요, 러시아 민족사에 길이 빛날 이름일 것이다. 특히 4,000점이나 되는 미술품을 사들인 걸로 시작해 오늘날 루블박물관, 대영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4대 박물관이라는 평가를 받는 에르미따쥐 박물관의 토대를 만든 것도 큰 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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