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운사 Jul 08. 2024

353. 리스본 트린다데 코엘료 광장

1913년부터 이 광장은 유명한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 호세 프란시스코 트린다드 코엘류(José Francisco Trindade Coelho, 1861-1908)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광장 주변에는 상 로케(Sao Roque) 성당이 있고, 그 옆으로 상 로케 박물관(Mueu de Sao Roque)이 있다. 광장의 동쪽 경계는 광범위한 사회 단지인 Santa Casa da Misericordia de Lisboa(자비의 성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자선 단체는 1498년 엘레노어 여왕에 의해 설립되었다. 엘레노어 여왕은 남편이 죽은 후 병자, 가난한 사람, 고아 및 예술가를 돕는 데 헌신했다. 이사회는 귀족 30명과 저명한 시민 3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단체는 병원을 유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나눠주고, 순례자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수감자들을 지원하고 석방하는 인도주의적 사명을 수행하고, 법을 어긴 사람들을 참된 길로 인도했다. 이러한 활동의 기금은 복권의 수익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광장 중앙에는 1862년 루이 1세(동 루이스 1세)와 사보이의 이탈리아 공주 마리아 피아(도나 마리아 피아 데 사보이)의 결혼식을 기념하여 세워진 오벨리스크 콘소르시오 드 동 루이스(Consorcio de Dom Luis-Lisboa)가 있다. 전해지는 야설(夜說)에는 국왕부부가 과자에 중독되어서 기념물인 오벨리스크가 막대사탕 모양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1861년 12월 루이스의 이복형인 페드로 5세(Pedro V) 국왕이 갑자기 사망했고, 곧 두 남동생도 저승으로 갔다. 따라서 갑자기 국가 경영의 책임이 루이스의 어깨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정치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취미는 시와 문학이었다. 특히 그는 포르투갈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최초로 번역했다. 새 왕은 결혼하지 않았으므로 혼인 문제는 가능한 한 빨리 해결되어야 했다. 루이스는 브라간자 왕조의 유일한 구성원이었고, 후계자가 시급히 필요했다. 큰 어려움 없이 왕은 유럽의 여섯 왕가의 공주들에게 결혼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냈다. 루이는 결국 공주 중 막내인 빅토르 에마누엘레 2세의 딸과 겨우 14세의 나이에 결혼했다. 신부를 태운 배는 10월 5일 리스본에 도착했고, 결혼식은 다음날 거행됐다. 어린 공주는 남편과 함께 기뻐했고 결혼은 행복할 것이라고 약속했고, 1년 후에 그들은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루이의 끊임없는 불신과 셋째 아들의 출산 실패로 인해 공주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지 만 충실한 배우자이자 돌보는 어머니로 남아있었다. 

오벨리스크 옆에는 복권 노점상(O Cauteleiro)을 묘사한 청동 조각상이 있다. 포르투갈에서는 복권이 매우 인기가 있으며, 국립 자선 복권은 2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예술가 Fernanda de Assis가 만든 이 조각품은 1987년에 설치되었으며, 그 이후로 리스본 주민들은 때때로 이 광장을 Largo do Cauteleiro라고 불렀다. 성당 앞쪽으로 파드레 안토니오 비에이라(Padre Antonio Vieira) 신부가 브라질 원주민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동상도 있다. 광장의 남동쪽 모퉁이에는 2층짜리 다락방이 있는 흥미로운 집이 있다. 광장에는 카페와 음료를 판매하는 매점, 지하 공중 화장실이 있으니 화장실이 늘 급한 여행객들은 무료로 사용하기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352. 리스본 상 도밍고 성당의 슬픈 역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