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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Nov 02. 2024

166> 赤壁(적벽)

漢詩工夫(241003)

赤壁(적벽)

 - 杜牧(두목)


折戟沈沙鐵未銷

절극침사철미소

●●○○●●◎

꺾어진 창 모래에 묻혀도 쇠는 아직 삭지 않아


自將磨洗認前朝

자장마세인전조

●○○●●○◎

스스로 갈고 씻으니 전 왕조의 것임을 알겠네.


春風不與周郎便

춘풍불여주랑편

○○●●○○●

동풍(東風)이 주랑(周郞 : 주유) 편이 아니었다면


銅雀春深鎖二喬

동작춘심쇄이교

○●○○○●◎

봄 깊은 동작대에 두 미녀(二喬) 갇혔으리.

* 적벽(赤壁) : 후베이성(湖北省) 자위현(嘉魚縣)의 북동(北東), 양쯔강(揚子江) 남안(南岸)에 있는 절벽(絶壁)으로, 중국(中國) 삼국시대(三國時代)인 208년(年)에 여기서 발생한 전투(戰鬪)를 ‘적벽대전(赤壁大戰)’이라고 한다.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무창(武昌) 서북쪽 적기산(赤矶山)으로 장강(長江) 남쪽 기슭에 우뚝 서 있다. 산의 바위가 붉은색을 띠고 있어 ‘적벽(赤壁)’이라고 부른다. 두목이 옛 적벽대전의 고사를 떠올려서 쓴 시(詩)다.

* 折戟(절극) : 꺾어진 창, 부러진 창.

* 麽洗(마세) : 갈고닦거나 씻음.

* 前朝(전조) : 전 왕조, 여기서는 삼국시대.

* 周郞(주랑) : 삼국시대(三國時代) 오(吳) 나라 대도독(大都督) 주유(周瑜)를 가리킨다. 자는 공근(公瑾)이고 손권(孫權)의 무장으로서 유비(劉備)의 제갈량과 연합하여 전투의 선봉에 서서 적벽대전을 승리로 장식해서 이름을 날렸다. 강동이교(江東二喬) 중 동생을 아내로 맞았다.

* 春風(춘풍): 동쪽에서 부는 봄바람을 뜻한다. 촉(蜀)의 군사(軍師) 제갈량(諸葛亮)이 조조의 수군(水軍)을 불(火)로 공격하기 위해 동남풍(東南風)을 이용했다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실린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다.

* 銅雀(동작) : 동작대(銅雀臺)로서 조조(曹操)가 만든 누대인데, 구리로 만든 참새로 지붕을 장식하여 붙은 이름이다. 옛터가 지금의 河南省 임장현(臨漳縣) 서남쪽 업성(鄴城) 안에 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제갈량이 주유(周瑜)를 촉발시켜 조조에 대항토록 하기 위해서 강동이교와 동작대를 이용한다. “조조의 두 가지 평생소원은 첫째 사해 평정, 둘째 강동이교를 얻어 동작대에서 즐기는 것”이라고 해서 주유를 흥분시켜 동참시킴.

* 二喬(이교) : 동한(東漢) 때 양국(梁國)의 태위(太尉) 교현(喬玄)의 두 딸을 가리키는데 모두 국색(國色)이었다. 중국(中國) 삼국(三國) 시대(時代)에, 재색(才色)을 겸비(兼備) 한 것으로 유명(有名) 한 오(吳) 나라의 대교(大喬)와 소교(小喬) 자매(姉妹). 대교(大喬)는 손책(孫策), 소교(小喬)는 주유(周瑜)의 아내가 되었다.

吳魏(오위)가 鏖兵(오병)하야. 赤壁所遺之折戟(적벽소유지절극)이 沈於沙際(침어사제)하니, 唐去吳日子未遠故(당거오일자미원고)로 其鐵(기철)이 尙未消磨(상미소마)라. 自將折戟磨洗一認(자장절극마세일인)하야. 信是魏武敗於周郞而前朝之遺跡(신시위무패어주랑이전조지유적)이 宛然(완연)이라. 夫周郞(부주랑)이 何以遂能勝魏(하이수능승위)리오. 似乎難信(사호난신)하야. 所以要認(소이요인)이라.

오와 위가 격렬히 싸워 적벽에 남은 부러진 창이 백사장에 묻혔는데, 당나라와 오나라 시대가 멀지 않기 때문에 그 쇠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스스로 부러진 창을 갈고닦아 한 번에 알았다. 참으로 이것은 위나라 무제(조조)가 주랑(주유)에게 패한 전조(前朝)의 남은 자취가 완연하다. 저 주랑이 어떻게 마침내 위나라를 이길 수 있었겠는가? 믿기 어려울 듯하니 앎이 긴요한 까닭이다.

周郞之所以勝魏者(주랑지소이승위자)는 恃有東風之便(시유동풍지편)하야. 所以得成功於火攻(소이득성공어화공)이어늘 今乃反其說(금내반기설)하야. 假如當日(가여당일)에 沒有東風則是無便可乘了(몰유동풍즉시무편가승료)라. 周郞(주랑)이 若無東風之便(약무동풍지편)이면 不但不能勝魏(부단불능승위)라. 恐江東(공강동)이 必爲魏破(필위위파)하야. 妻子不保(처자불보)라. 大喬小喬春深時(대교소교춘심시)에 貯在銅雀臺上矣(저재동작대상의)니. 此以議論行時者(차이의론행시자)라. 杜牧(두목)이 精於兵法(정어병법)하야. 此詩似有不足周郞處(차시사유부족주랑처)라.

주랑이 위나라를 이긴 것은 동풍의 이로움이 있을 것으로 믿어서, 화공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인데, 지금 바로 그 이야기를 돌이켜보면 가령 만약 당일에 동풍이 없었으면, 이길 수 있는 편이 없었을 것이다. 주랑이 만약 동풍의 편의가 없었더라면 위나라를 이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강동이 반드시 위나라에 부서져 처자를 보호할 수 없을까 두려웠다. 대교와 소교가 봄이 깊어진 때에 우두커니 동작대 위에 있었으니, 이는 행군을 의론 할 때인 것이다. 두목이 병법에 정밀하여 이 시가 주랑의 처사에 부족함이 있는 것 같다.

* 杜牧(두목) : 지금의 산시(陝西)성 성도(城都)인 시안(西安)에 해당하는 경조(京兆) 만년(萬年) 출신이다. 자는 목지(牧之)라 했고, 호는 번천(樊川) 또는 번천거사(樊川居士)라 했다. 『통전』이라는 역사서를 남긴 재상 두우(杜佑)의 손자이기도 하다. 문종 대화(大和) 2년인 828년에 진사가 되어 홍문관교서랑(弘文館校書郞)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일찍이 강서선흡관찰사(江西宣歙觀察使) 심전사와 회남(淮南) 절도사 우승유 밑에 들어가 감찰어사(監察御史)와 후베이성 황저우(黃州)와 안후이성 츠저우(池州), 저장성 목주(睦州) 등지의 자사를 지냈고, 조정에 들어가서는 사훈원외랑(司勳員外郞)이 되었다. 무종 회창(會昌) 연간에 고공낭중(考功郎中)과 지제고(知制誥, 국왕의 교서 작성직),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역임했다. 문장과 시에 능했던 두목은 이상은과 더불어 ‘소이두(小李杜)’로 불렸다. 대표작으로 「아방궁부(阿房宮賦)」 외에 「강남춘(江南春)」과 『번천문집(樊川文集)』20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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