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가지(賈至)가 파릉의 밤에 왕팔 원외랑을 이별한 것이다. 버들 솜이 날리는 늦봄에 집을 작별 하고 나와 매화가 만발한 이제 한해의 초봄에 이르러, 다시 삼상에 있으니 종적이 무상하고, 모이고 흩어짐이 일정하지 않아 바로 뜬 구름과 같은 감회가 있는 것이다. 그때에 왕 원외가 장사로 좌천되고 賈至(가지) 역시 귀양을 받은 까닭으로 세상 물정의 消散(소산 : 사라지고 흩어짐)하여 뜬 구름과 같음을 깨달은 것이다.
왕 원외는 동정호 남쪽으로 유배되었으니, 이는 강물을 길게 따라온 것이니 이별의 한이 길어 강물을 따른 것이고, 다만 세상 물정이 이미 사라지고 흩어져서 비록 한스런 근심이 있지만 또한 무슨 보탬이겠는가? 그러므로 공연히 따른다고 한 것이다. 버들 솜이 날리는 때는 늦봄이고, 매화가 만발한 때는 초봄이니, 이는 두 해가 지난 것이다.
* 가지(賈至, 718년 ~ 772년) : 당나라 하남(河南) 낙양(洛陽) 사람. 자는 유린(有隣) 또는 유기(幼幾)고, 가증(賈曾)의 아들이다. 현종(玄宗) 천보(天寶) 10년(751)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단보위(單父尉)가 되었다. 안록산(安祿山)의 난 때 황제를 따라 촉(蜀) 땅으로 달아나 기거사인(起居舍人)과 지제고(知制誥)를 지냈다. 제위를 숙종(肅宗)에게 넘기자 전위책문(傳位冊文)을 지었고,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올랐다. 지덕(至德) 연간에 장군 왕사영(王士榮)이 일에 연좌되어 참수를 당하게 되자 재주를 아낀 황제가 사면했는데, 그가 간언하여 처형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작은 법에 연좌되어 악주사마(岳州司馬)로 좌천되었다. 대력(大曆) 연간에 상서우승(尙書右丞)과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다. 1년(766) 경조윤(京兆尹)이 되었고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했고, 준일(俊逸)한 기품은 남조 때 송나라의 포조(鮑照)와 유신(庾信) 등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했다. 문집 30권이 있다. 시호는 문(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