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쓰는 이야기
누가 만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소설 쓰다가 자빠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2024년, 나는 올해 육아 휴직에 들어가며 마치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는 듯 마음속에 묵혀놓은 일들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 글쓰기이다.
올해 초부터는 에세이 모임을 통해 글 걸음마를 시작했는데, 연말이 된 지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역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현역 작가의 단편 소설 쓰기 프로그램을 수강하고 있다. 8주 일정으로 A4 열 장 내외의 단편을 완성한다는 탄탄한 프로그램 구성이라서인지 프로그램 신청부터 초를 다툴 정도로 매우 치열했다.
티켓 예매에 필수라는 네이버 표준시계를 옆에 켜두고 몇 번의 새로 고침 후에 당당히 열 명의 수강생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막상 시작하려 하니 단편 소설을 읽어 본 기억이 까마득했다. 아침마다 듣던 라디오 DJ가 인생 책이라 추천한 데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제외하니 내가 아는 단편 소설은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만났던 소설들이 전부였다. 독서습관을 되짚어보니 엄마가 되고부터는 두툼한 소설책 읽기가 버거워 짧은 호흡으로 끊어 읽을 수 있는 에세이나 인문학, 자기 계발서 같은 비문학을 주로 읽어왔다.
단편 소설을 한 편 완성하는 수업. 이런 수업은 SNS에서 글 좀 써 본 필력 좋은 젊은이들이나 적어도 학창 시절 팬픽이나 판타지 소설을 써본 사람들이 수강하지 않겠느냐는 두려움만 커져갔다. 수업 전 사서가 보낸 문자는 내 두려움 더미에 불씨를 던졌다. 이 수업은 단편 소설을 완성하는 수업이니 끝까지 참여할 수 없으신 분은 참여 여부를 재고해 달라는 문자였다. 나는 사실 그때 도망가고 싶었다. 나를 이 수업에 끌어들인 이웃 동지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혼자서는 끝까지 완주할 자신이 없어 도망갔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단편 소설 수업이 벌써 절반을 넘어 다섯 번째에 접어들었다. 매주 지도 작가가 추천한 단편 소설 두어 개를 읽고 분석한 후, 필사를 한다. 이제는 소설을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닌 하나의 건물로 인식해 뼈대와 내장재를 살펴보기도 한다. 수업 전에는 동료 수강생들의 글을 꼼꼼히 읽으며 합평에서 언급할 내용도 작성해야 한다. 이곳은 글쓰기의 또 다른 세계이다. 나는 그 세계에 들어왔다는 생각에 설레면서도 수업을 들을수록 커져가는 무언의 감정을 느낀다.
‘소설가는 신과 같은 사람이 아닐까?’ 이것이 너무 과하다면 이렇게 생각한다. ‘소설가는 절대 내가 닿을 수 없는 연예인 같은 거 아닐까. 예를 들면 아이브의 장원영 같은..’
고등학교 때 등단했다는 박서련 작가의 기발함과 과감함을 보며, 다채롭고 날카로운 일상의 이야기를 소설화시키는 김기태 작가의 세련됨을 보며 나는 점점 쭈그러들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단편 소설의 독자가 되어가는구나.
에너지 좋은 시기의 나는 꽤나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편이다. 단편 소설 쓰기 수업이 시작하며 도서관에서 작법서를 검색해 하나둘씩 빌리기 시작했고, 이상 문학상 단편집을 세 권 읽었다. 그 외에 몇 권의 단편집을 읽고 분석하며 엄청난 세계관을 가진 장편에 비해 그래도 단편은 비벼볼 만하지 않겠느냐는 오만한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평소 무언가를 시작할 때 연구라는 명목으로 꽤 많은 시간을 소비(지체)하는 편인데 이번에도 단편 무작위 독서를 통한 시장조사가 이루어진 셈이다.
하지만 써야 할 때가 왔다. 한동안 무엇을 쓸지 고민하다 평소에는 스쳐 지나가던 뉴스들을 자세히 읽어봤다. 스위스의 안락사 기계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빈 껍데기 깡통이었다는 이야기나 평안도에서 태어나 6.25에 참전 후 남한에서 75세에 맥도날드에 취업해 92세에 퇴직한 할아버지에 대한 기사를 읽을 때면 엉덩이가 자꾸만 들썩거렸다. 하지만 이런 소재로 낱장이 아닌 열 장 분량을 채우기엔 내 필력이 가당치 않다는 아쉬운 결론을 내렸다. 결국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딩크여성과 유자녀 여성들의 싸움을 유발시킨 인기글을 읽으며 가임기의 끝자락 앞에서 출산을 고민하게되는 딩크아내의 내적 갈등을 소재로 정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는 과제와 시간에 쫓기고 있다. 과제를 제출한 후 수업 일까지 이틀을 제외하면 가슴에 돌덩이 하나 얹은 거 마냥 묵직하니 답답하다. 처음의 호기롭던 기세와는 달리 이 세계는 좀 더 섬세하고 깊은 것 같다.
나의 염려와는 달리 수강생들의 작문 수준은 엇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소설임에도 글마다 작가의 삶이 천차만별로 묻어난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지난주 합평시간에는 동료 수강생이 내 소설을 읽고 질문했다. “작가님 이야기인가요?”
100% 허구라 대답했지만, 글에 지문이 찍힌다는 말처럼 내가 창작한 글에는 나의 삶이 조금씩 녹아있다. 그래서 더 어려운 걸까?
오늘도 가족들이 잠든 늦은 밤, 딸의 방에서 스탠드를 켜둔 채 깜빡이는 커서와 눈싸움을 한다. 이 주간 겨우 써 간 글의 합평을 들을 때마다 어디까지 갈아엎어야 하나라는 생각에 머리를 쥐어뜯는다. 정말 완성할 수 있는 것인가? 용두사미로 대충 얼버무려 끝내면 너무 아쉬울 것 같은데 색다른 플롯이 떠오르지 않는다. 머리를 짜내서 쓴 초고의 몇 문단을 아쉬워하며 수정한다.
화요일, 또다시 수업일이다. 글쓰기는 괴롭지만 써놓은 글이 나보다 낫다라던 어느 작가의 말이 기억난다. 아직은 부끄러움이 가득한 글을 안고 삶과 견주어 본다. 계속 쓰다 보면 내 삶도 더 깊어지리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