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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마치 Mar 30. 2022

F.E.A(전부 꺼져버려)

영화 <트루스>





"F.E.A."

'전부 꺼져버려, 다 깨부수자(Fuck thEm All)' 등의 뜻을 담은 이 말은 극 중 CBS 방송국의 시사 프로그램 '60분' 팀이 구호처럼 외치는 말이다. 영화를 보며 '이 정도의 깡다구가 있어야 미국 대통령의 비리를 수면 위로 끄집어낼 수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트루스>는 메리 메이프스(케이트 블란쳇)라는  베테랑 프로듀서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2004년 당시 미 전역을 놀라게 했던 실화이며 실존 인물 메리 메이프스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방송국 간판 앵커 댄 래더(로버트 레드포드)를 비롯해 4-5명가량으로 구성된 '60분' 팀은 미국 부시 대통령의 군 복무 비리 의혹을 제기, 심층 보도 방송을 한다. 하지만 증거를 찾고 취재하고, 이를 방송으로 내보내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이들을 찾아온다. 방송을 막으며 "증거는 조작됐고 해당 보도는 오보"라는 주장에 메이프스 일행의 끝까지 맞서며 치열하게 싸운다. 케이트 블란쳇과 로버트 레드포드의 명연기를 볼 수 있는 건 덤이다.




"뉴스 제작에 20년을 보냈고 두 번 에미상을 탔고 아부그라이브도 취재했어요,
전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술이나 약물 남용도 하지 않아요.
난 프로듀서예요. 취재 거리를 찾고 팀을 구성하고 글을 쓰고 편집하죠."





누구나 잠재된 전투력이 있기 마련이다. <트루스>는 볼 때마다 내 속에 조용히 잠들어있는 싸움의 기질을 건드린다.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발톱을 세우는 게 아니라, 긍정적인 차원에서의 정의감과 활력 그리고 용기를 준다는 뜻이다. 나는 천성이 평화주의자인지라 살면서 싸울 일이 잘 없었지만 부당함이나 몰상식함 앞에선 또 곧잘 으르렁대는 편이다.  그런 내가 보기에 메리 메이프스와 '60분' 팀의 고군분투는 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를 끌어올리게 하는 방아쇠 같은 것이다.

아마 대학생 시절 언론인을 꿈꾸며 영화를 봤기 때문에 더 몰입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언론 영화들보다 <트루스>를 꼽는 이유는 주인공 '메리 메이프스'의 존재 때문이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스포트라이트>를 비롯해 <더포스트> 등 언론을 소재로 한 다른 영화들은 주로 인물들이 취재하는 사건이 내용의 중심이 된다. 하지만 <트루스>의 경우 사건과 더불어 메리의 인생에 대해서도 초점을 맞췄고, 그녀가 영화를 끌고 간다. 세상에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 있는 PD이기 이전에 그는 누군가의 딸이자 엄마, 아내라는 것. 그리고 세상은 여전히 여성을 향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또한 메리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여성 관객으로서 메리의 서사에 조금 더 감정 이입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배우가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점도 <트루스>를 보며 끌어오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메리의 이야기는 이렇다. 아버지로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여아는 성인이 돼서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PD로서의 능력을 갖춘 것은 물론 그녀의 곁엔 사려 깊은 남편과 귀여운 아들, 그리고 '진짜'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되어준 댄 래더가 있었기에 성인이 된 메리의 삶은 척박하지 않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불쑥불쑥 나타나 그녀의 일상을 휘젓는다. 

영화는 불우한 그녀를 향해 감상적인 연민을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메리는 프로그램 존폐가 달린 위태로운 순간에도 그녀를 들쑤시는 그 존재 때문에 무너진다. 하지만 무너지던 순간에도 끊임없이 강하다. 부당함에 대해 저항한다. 자신에게 피해가 될지언정 할 말은 똑바로 하는 여성을 보며 어떻게 불쌍히 여길 수 있으랴. 응원을 보탤 뿐.






"우린 부시가 군인의 의무를 다했느냐고 물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거기엔 아무도 관심이 없고 다들 폰트와 위조 음모 이론만 떠들어대죠. 왜냐하면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 때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하거든요. "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배우가 가진 힘과 메리라는 인물의 시너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그야말로 'F.E.A' 정신을 실현하며 앞에 앉은 샌님들에게 팩트를 하나하나 떠먹여주는 장면. 결국 어떤 결말이 날지 뻔히 알면서도 절대 굽히지 않는 메리를 보며 나는 '크~'라는 소리를 내며 박수칠 만큼의 용기를 얻는다. 실패할지언정 안주하지 말라고, 옳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고개 숙이지 말라고 등짝을 한 대 세게 때려주는 것 같다. 적어도 내겐 <트루스>가 그런 의미로 다가온다. 그래서 영화의 끝, 댄 래더의 마지막 방송에서의 한 마디가 울림이 크다.



Courage.
(용기 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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