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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마치 Dec 08. 2020

평범한 두 사람의 살구 맛 용기

영화 <노팅힐>






기억은 다양한 형태로 남는다. 노랗고 빨갛게 잘 익은 천도복숭아를 한 입 베어물면, 십여년 전 로마의 어느 식당으로 가게 된다. 지중해 햇살을 가득 받아 과즙이 아주 풍부했던 천도복숭아. 애피타이저였지만 메인 요리보다 더 오래 남은 달콤한 맛이다. 지금 서울에서 먹는 복숭아는 이탈리아의 그것은 아니지만 그 때  풍경을 눈앞에 보여준다. 로마 여행의 기억이 혀에 남아버린 바람에 매년 여름 천도복숭아 시즌은 이탈리아행 비행기표를 뒤적거리게 된다.


<노팅힐>  머릿속에 '색채' 남았다. 애나(줄리아 로버츠)와 윌리엄(휴 그랜트)이 입었던 옷 색깔인 연한 하늘색과 핑크색 조합만 보면 제일 먼저  영화가 떠오른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다. (참고로 군것질을 좋아하던 친구 A 하늘색과 분홍색 조합은 그저 '솜사탕' 떠오르게  뿐이라고 했다.)  밖에도 <노팅힐> 어떤 이미지나 추상적인 분위기로 먼저 맴돈다. 상인들이 줄지은 노팅힐 거리의 햇살과 옅은 바람, 윌리엄이 계속 걸었던 사계절 롱테이크 , 옥상에서 입었던 애나의 포근한 스웨터. 글로 늘어놓으니 다소 장황하고 두서없지만, '노팅힐'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각종 형용사들이 순식간에 하나로 모이는 기분이다. 실제로 영국 노팅힐에 가본 적이 없어 날씨가 피부로  닿지는 않으나 분명 4월에서 5월이 되는  어디쯤의 공기일테다.


 누군가 '인생 영화'를 물어올 때 늘 3위권 안에 드는 작품 <노팅힐>. 이 영화를 처음 봤던 게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처음 본 그 느낌을 잊지 못한다. 언제 봐도 행복해지는 영화는 특정 명대사, 명장면을 넘어 영화 속 세상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풍경과 바람, 색과 음악 모두를.









짐작건대  윌리엄이 살던 노팅힐 자체를 사랑하게   아닐까. 어쩌면 애나에게 윌리엄의 집은 그가 애매한 표정으로 건넸던 '꿀에 절인 살구' 기억에 남았는지도 모른다. 물론 애나는 '살구맛은 안나고  맛만 난다' 그것을 먹지 않았지만. 애나에게 노팅힐은 버버리힐즈의 커다란 집보다도 사랑스럽고 따뜻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윌리엄 친구들의 엉뚱하고 왁자지껄한 대화, 맛있지만 눈물 젖은 브라우니가 있는 .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 따뜻한 사람들의 솔직한 '용기' 가득차있는 .


 





 '용기!'  영화에서 인물들이 보여주는 순수한 용기가 부러웠다.  만약 파란 대문집에 사는 책방 주인 윌리엄이 ‘슈퍼스타 만났다며 호들갑을 떨거나,  애나에게  보이기 위해 어떤 ‘ 했다면 그는 매력적인 남자로 보였을까. 윌리엄은 애나에게 가짜였던 적이 없다. '빛나는' 그녀에게  괴짜 친구들을 소개하고, 냉기도 안나오는 듯한 냉장고에서 살구 따위를 권할 때도 그는 있는 그대로를 스스럼없이 보여준다. 바로 그런 점이 애나의 마음도 열었다. 주변에 영양가 없는 빈말과 뒷담화를 늘어놓는 사람만 많은 애나가 윌리엄을 좋아하지 않을  없었다. 물론 서로 오해를  순간도 있었고, 윌리엄도 애나를 감당할  없겠다고 포기를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애나 역시 솔직한 마음 하나 들고 서점으로 찾아가는 용기를 냈다.


어찌 보면 용기의 연속이었다. 

런던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찾아가는 윌리엄의 용기. 제가 다칠까 마음 닫은 윌리엄에게 ‘나는 평범한 여자일 뿐’이라 고백하는 애나의 용기. 심지어는 당장 호텔 문을 열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기세로 달려들던 든든한 친구들의 용기. (게다가 자신을 흉보는 시시한 남자들에게 웃는 낯으로 한 방 먹여주는 애나의 통쾌함까지.)

사람이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솔직한 용기를 내는 순간이 얼마나 있을까. 어쩌면 진솔하다고 여기는 관계에서도 우리는 무의식중으로 계산하고, 상황을 따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솔직함은 종종 상대의 마음을 여는 열쇠가 된다. 만약 내가 톱스타의 옷에 오렌지주스를 쏟았다면 근처에 집이 있으니 함께 가자는 말이 아니라, 연신 ‘죄송합니다’를 외치며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마음이 진정되면 ‘아니 모퉁이에서 주위 살피지 않은 건 본인도 마찬가지 아닌가’ 라며 볼멘소리를 했을지도. 그러니 윌리엄이 내민 손과 그 손을 잡고 그의 집을 찾아온 애나의 용기는 충분히 아름답고 멋지다.


그 모든 일이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질 운명이었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명제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운명을 만들기 위해 순간마다 용기를 낸 두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이 영화가 더 아름다운 것 아닐까.  애나처럼 영화에 나오는 헐리우드스타가 아니어도 상대는 우리에게 별 같은 존재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드라마틱한 사랑의 순간들이 있고,  ‘she’가 흘러나오는 순간은 있을 테니까. 그러니 사랑을 원한다면 '꿀에 절인 살구'를 권하는 정도의 용기는 내 봐야겠지?




노팅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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