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센터 영어회화반 첫 수업에서...
동네 문화센터 '영어회화반'에 등록했다.
따로 영어 공부란 걸 안 하니 머릿속에 남아있는 영단어라는 게 몇 개 없고, 집에만 있으니 느는 건 살뿐이고 하여 집 밖으로 나갈 거리를 만든다는 게 문화센터 영어회화반에 등록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화요일 첫 수업에 참석했는데, 혼자가 아니라 조카와 함께였다.
다른 것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조카가 영어회화반에 등록했다는 내(이모) 얘길 듣고 저도 같이 다녀보고 싶다고 했다는 게 둘째 언니의 전언이었고, 그렇다면 나도 OK했던 거였다.
조카는 둘째 언니가 스물둘에 나은 첫아들로 28세 청년이다. 하지만 평범한 또래 청년들과는 달리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장애가 있는 건 아니지만, 또래와 비교해 남다른 구석이 있는 아이긴 하다) 집안에서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어쨌든 집 밖으로 나올만한 뭔가를 만든 건 나뿐만 아니라 조카를 위해서도 잘한 일 같았다.
강의실에 들어서서 조카와 함께 자리를 잡고 앉으니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 강사가 "새로 오셨어요?"하고 물었고, 그 물음에 다른 수강생들의 이목이 우리에게 집중됐다. 교회에 새로 온 새 신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난 "네"라고 답했고 "같이 오신 것 같은데, 두 분 관계가 어떻게 돼요? 형제예요?"라고 강사가 또 물었다. 나와 조카를 母子가 아니라 형제지간으로 봐주니 감사하긴 했다. 하지만 곧바로 이모와 조카 사이라고 말했고, 사람들은(강사 포함) 이모와 조카가 함께 영어회화반에 등록한 게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물론 흔한 경우는 아닐 테니 그런가 보다 했다. 강사는 웃으며 "영어 실력 들통나면 둘 중 누가 더 쪽팔릴 것 같아요?"라며 농담같은 질문을 건넸고, 나는 또 솔직하게 답했다. “서로 못하는 거 아니까, 둘 다 안 쪽팔려요.”
강사는 계속 질문이란 걸 하며 수업을 이끌어나갔다. 어떤 모자 쓴 60대 아주머니에게는 모자가 예쁜데 어디서 사셨어요?라고 물었고, 더 나이 지긋해 보이는 아주머니에게는 딸이 시집가서 안 섭섭하냐, 딸이 연애결혼 했냐, 중매결혼 했냐 등을 물었고(강사는 수강생들의 집안 대소사를 알 정도로 기존 수강생들과 친밀해 보였다), 그렇게 해서 오고 간 문답을 영어로 다시 말하는 식이었다.
화이트보드에 by love, by arrangement를 차례로 쓴 강사가 이번엔 질문의 화살을 조카에게 날렸는데, 그 질문이란 것이 by love는 연애로, by arrangement 중매로,라는 뜻인데, 어떤 결혼을 하고 싶냐는 거였다. 조카는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오전 수업을 듣게 된 터라 비몽사몽인 상태인 듯했고, 그래서인지 "I want a normal marriage(나는 평범한 결혼을 원한다)"라는 질문과 동떨어진 답을 했다.
강사가 잘 안 들렸는지 “뭐라고요?” 하자, 조카의 말을 no marry로 들은 앞자리 여자가 조카 대신 “결혼 안 할 거래요”라고 말해 수강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도 당시에는 no로 들었는데, 나중에 조카에게 듣고 알았다. normal이라고 했다는 걸) 강사는 좀 과장되게 놀란 표정으로 “아니 왜? 그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라고 했고, 조카는 결혼 안 하겠다는 답이 아니었다고 말하면 될 것을 그게 귀찮았는지 아니면, 결혼 '안 할' 마음도 있었는지 결혼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세 가지나!
*영어실력 부족한 조카 표현 그대로 옮깁니다.
조카의 답변마다 또 수강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고, 특히 셋째 이유(My wife angry∼)에서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강사는 조카가 말한 첫 번째 문장(첫째 이유)을 I don't have enough money to get married로 정정해 준 다음, 결혼 문제는 혼자 판단하지 말고 주변 어른들의 조언을 구하라고 말했다. 주변 어른이라면 나도 포함일 텐데, 결혼을 해야 좋은 건지 아닌지는 나도 알지 못했다. 20대 청년은 잘 모를 거라는 생각, 또는 20대가 모르는 걸 그보다 많은 나이는 알 거라는 생각, 그것도 편견 아닐까? 그런데 강사가 “옆에 계신 이모랄지...” 하고 말을 잇더니 나를 보며
이모님은.. ('당연히'라는 표정으로) 결혼하셨죠?
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처음 본 사람들 앞에서 결혼 여부를 밝히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당황스러웠지만, 질문이 내게 온 이상 답을 안 할 순 없었다.
“아...아니요.”
멋쩍은 웃음과 함께 내놓은 나의 대답에 다들 놀란 토끼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는 고개를 무리하게 돌려가면서까지 맨 뒷줄에 앉아 있던 나를 보며 놀람을 표했다. 그 순간 결혼이라는 정상 범주에서 이탈한 신기한 인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강사는 “아 그래요? 집안이 다 싱글이네”하며 웃다가 “그럼 이모님.. 앞으로도 결혼 안 하실 거예요?”라고 했고, 나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답했다. 사실 나는 답이 아니라 강사에게 묻고 싶었다. “저는 강사님이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 하나도 안 궁금하고.. (결혼) 안 했다고 해도 앞으로 할 건지 말 건지는 더더욱 안 궁금한데 강사님은 왜 그런 걸 저한테 물으세요?”라고.. 이런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진 않지만, 강사는 뒤늦게 “원래 이런 거 물어보는 거 아닌데... 미안합니다.” 하며 겸연쩍어했다. 나는 속마음과는 다르게 미소 띤 얼굴로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다고 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괜찮기는커녕 찝찝한 마음이 오래도 갔다.
내가 쿨하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세상이 나한테 무디고 무례한 걸까?
어느 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