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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림 Aug 26. 2024

비혼과 무소유

가진 게 없는 자의 기쁨(?)

비혼 남녀에게는 결혼하지 않았으므로 추가적인 가족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까 태어난 순간 내 의지나 선택과는 상관없이 형성된 가족관계 말고는 가족이 없다는 얘기다.

무소유 뜻이 ‘가진 것 없음’이니 더 이상 가족을 갖지 않는 비혼을 무소유의 실천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이게 바람직한 건지 아닌지는 논외로 하고 말이다.   

  

비혼과 무소유를 나란히 두고 생각해 본 건 최근 일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소유하지 않던 것을 소유해 보고 또 그것을 다시 처분하는 과정에서 소유의 불편함과 무소유의 홀가분함을 몸소 느끼며, 이래서 나는 비혼인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 건데, 그렇다고 내가 불필요하거나 값비싼 걸 소유했던 건 아니다.     


나는 서울 생활을 접고 본가가 있는 고향으로 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없던 차 한 대를 ‘소유’하게 된다. 강의실이 원체 캠퍼스 꼭대기에 있어 통학 편의상 차가 필요하기도 했고, 마침 그때 큰 언니가 나에게 중고차 한 대를 선물해 주마 하여 나는 필요한 것을 돈 안 들이고 소유하게 된 거였다.


언니가 나에게 마시는 차가 아닌 ‘타고 다니는’ 차라는 통 큰 선물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하자면, 그때는 형부가 수천만 원을 들여 자기 어머니 집(언니의 시댁) 리모델링 공사를 해주고 있던 때였는데, 그것이 언니로 하여금 ‘그렇다면 나도 내 친정을 위해 뭔가를 해줄 거야’라는 마음을 먹게 했고, 그것이 ‘내 차 선물’로 귀결된 것이었다.


연식이 오래된 몇백만 원짜리 중고차이긴 했지만, 어쨌든 나로선 감지덕지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 감사함과는 별개로 차의 쓸모는 크지 않았다.

통학용으로 마련한 건데 대학원 한 학기 다니고 코로나가 터져 대면수업이 줌수업으로 대체되었다. 나중에 일부 수업이 다시 대면으로 전환되긴 했지만, 대학원 졸업할 때까지 계속된 팬데믹 상황 때문에 통학용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내 차는 학교 땅을 몇 번 밟지 못했다.


차가 생겼으니 학교 갈 때가 아니더라도 남들처럼 마트에 장 보러 갈 때, 엄마 모시고 병원 갈 때, 어디 놀러 갈 때.. 그렇게 유용하게 쓸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바로 배달 오는 시대에 마트 갈 일은 많지 않았고, 비교적 건강하신 엄마 덕분에, 엄마를 모시고 병원 갈 일이라는 것도 많지 않았고, 놀러 갈 데라곤 언니 집뿐인데, 내가 언니 집에 가는 것보다 언니가 (엄마도 계시고 하니) 우리 집에 오는 일이 더 많았으니까.     


내 차는 내가 대학원에 갈 때나(주 2회 정도나) 굴러갔고, 나머지 날들은 주차장에서 편히 쉬었다. 그렇게 된 데는 무엇보다 내 성향이 한몫한 듯했다. 차가 있으므로 해서 파악한 나의 성향은 다음 두 가지였다.

1. 나는 운전을 즐기지 않는다.

2. 나는 차 있다고 싸돌아다니는 인간이 아니다.(차 있다고 집순이 성향, 어디 안 갔다!)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자 쉬는 날이 더 많아져 버린 내 차는 급기야 방전사태까지 맞이하였다. 나는 강아지 산책시키듯 자동차 산책을 시켜야 했다. 제2의 방전사태를 막기 위해 나갈 일이 없는데도 혹은 나가고 싶지 않은데도 차를 몰고 나가야 했다. 그게 귀찮아 며칠째 그냥 집에 있을 땐 밖에 세워둔 차가 여러모로 신경 쓰였다. 차를 굴리기 위해 출퇴근할 일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싶었다.(당시 나는 프리랜서 재택근무자였다) 차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건지, 내가 차를 위해 존재하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나는 어느 겨울날, 야외주차장에 세워둔 내 차 위에 소복이 쌓인 흰 눈을 힘겹게 치우며 다시 뚜벅이 생활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선물 받은 차이니 차의 수명이 다할 때까진 몰고 다니자 했겄만.. 나는 차를 팔고야 말았다! 물론 차를 선물해 준 언니, 형부에게 사전 양해를 구한 상태였다. 


차를 처분하고 난 뒤 서운함보단 홀가분함이 컸다. 무소유의 기쁨이란 이런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데 나는 또 없던 것을 소유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일의 능률을 핑계 삼아 작업실을 덜컥 얻어버린 것이다. 월세로 얻은 것이니 ‘소유’보단 ‘임대’가 더 정확한 표현이겠으나 여기선 그냥 소유로 치겠다.     


당시는 일거리라는 게 있는 프리랜서였고, 그 일거리란 집에서도 할 수 있고 또 해온 일이었지만, 주거공간과 업무공간이 분리되면 좋겠다는 바람은 가지고 있었다.

동네 카페주인이 카페 구석진 자리를 날 위해 매일 두세 시간 정도만 임대해 주면 좋겠다고.. 이왕이면 애견 동반이 가능해 오가는 길에 울 댕댕이 산책도 시키고, 여느 직장인처럼 출퇴근의 기분도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생각은 자유니까. 그러다가 집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강아지를 데리고 다녀도 될 만한 작업실용 원룸을 얻었다.


그런데 또 생각만큼 작업실의 쓸모가 크지 않았다.


작업실을 얻은 이유 중 하나가 엄마가 틀어놓은 거실 티브이 소리가 일에 방해가 될 때가 있어서였는데(엄마한테 이 얘길 한 적은 없다. 내 눈치 보실까봐) 이상하게도 작업실을 얻은 뒤부터 엄마의 외출이 잦아진 것이다. 또 이놈의 댕댕이가 작업실에만 데려가면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짖어대는 통에 일의 흐름이 자꾸 끊겼다. 낯선 냄새 탓도 있을 테고, 집에서 났던 백색소음(엄마가 티브이를 보시거나, 살림을 하시거나, 전화통화를 하실 때 나는 소리) 없이 절간처럼 조용한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댕댕이를 데리고 작업실로 출근하는 건 얼마 못 갔다.


엄마가 없으면 없어서 집에 있고,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집에 있고, 컨디션이 별로면 별로여서 집에 있고, 혼자 있는 댕댕이가 눈에 밟히면 그래서 또 집에 있다 보니 내 작업실은 사용되는 날보다 방치된 날이 더 많았다. 굴러가는 날보다 멈춰있던 날이 더 많았던 내 前 차 신세와 똑같았다. 그럼에도 따박따박 월세는 나가고 있었으니 나는 월세의 불편함인지 소유의 불편함인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필요 없음’을 깨닫기 위해 뭔가를 소유하는 것만 같았다. 엄마는 이런 나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냥 집에서 일하면 되제, 뭐 하러 작업실을 얻어! 돈지랄이 하고 싶어서..” 

월세에 작업실 꾸미느라 들인 돈까지 생각하면 돈지랄이 맞아서 말대꾸 못했다.


나는 결국 계약기간을 다 못 채우고 작업실과도 bye bye 하게 되었다. 작업실이 떠나고 ‘웬만하면 뭘 가지려 말고 그냥 살아라’라는 교훈이 남았다. 그리고 가진 게 없는 자의 기쁨이란 것도...

나는 진정으로 '없는 게 속 편한 자'인 것 같았다. 그것이 어쩌면 나를 비혼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소유가 기쁨인 자, (남편도, 자식도, 시댁도 없는) 비혼을 즐겨라!" 이건 내가 나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설령 운명이 나를 비혼에서 결혼으로 이끈다 하더라도 결혼만큼은 후회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이미 배우자가 된 사람을 필요 없다고 중고시장에 내놓을 수도 없고... 어쨌든 다시 싱글이 되는 건 차나 작업실을 처분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까다로운 일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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