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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림 Aug 15. 2024

말하고 싶은 비밀

하이틴 로맨스 읽다가 나의 하이틴 시절로 돌아가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영국의 소설가 '클라이브 루이스'가 했다는 이 말에 난 다음과 같은 한 줄을 보태고 싶다. 

"우리는 (우리의) 연애 세포가 죽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도 책을 읽는다" 


2년 전 나는 어쩌다 쓰게 로맨스 판타지물로 멘토링 프로그램이 있는 스토리지원사업에 참여했다가 멘토로부터 "장르가 로맨스인데, 로맨스가 없어요"라는 지적을 받은 바 있다. 그건 곧 단팥빵인데, 단팥이 없어요와 같은 말이었는데, 지적을 받은 후에도 단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단맛 본지 너무 오래라 달다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처럼 좀 헤맸다고나 할까? 헤매다 말았으니 좋은 결과물도 없었고, 로맨스물에 자신감이 떨어진 상태였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대형서점 많고 많은 책 가운데 《말하고 싶은 비밀》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온 건.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눈에 꽂힌 책 제목보다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설렘 폭발 연애 세포 충전 로맨스'라는 문구였다. 나이에 사춘기 애들 나오는 하이틴 로맨스 따위 읽고 설레겠냐? 하는 의심도 없진 않았지만, 곧장 책을 계산대로 가져갔다. 로맨스물에 재도전하려면 뭐로든 채워야 했다. 내 안에 달달한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비밀》은 평범한 여고생 구로다 노조미 앞에 불쑥 날아든 짤막한 러브레터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나는 40줄의 나이를 망각한 채 고딩 여주 노조미에게 제대로 감정 이입해 러브레터의 발신자인 학교 최고 인기남 세토야마에게 푹 빠져버렸다. 기대 이상의 수확이었다. 그러다 현실로 돌아온 건 책 보던 내 옆에서 널브러져 있는 봄이(울 집 댕댕이)에게로 눈길을 돌렸을 때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깨방정 떨던 아인데, 요즘 들어 가만히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싶은 게 내 청춘처럼 봄이의 청춘도 가는 중이거나 이미 가버린 것만 같았다.


우리 봄이, 이렇게 놀던 아이였어요


올해 나이 10세, 사람 나이로 치면 50대 중후반.. 우리 집에 아기로 와서 이제는 내 나이를 훌쩍 넘어선 봄이... 그야말로 속절없는 세월인 거 같아 좀 서글픈 마음마저 들었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둘째 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다소 좀 쳐진 톤으로 "우리 봄이가 부쩍 늙은 느낌이야"라고 말했다. 언니는 새삼스러울 없다는 듯 "늙었으니까"라고 말한 뒤 "아이고, 인생의 단맛 쓴맛도 못 보고.. 결혼하고, 새끼 낳고도 못 해보고 늙어버렸네" 하며 웃는 것이 아닌가. 봄이는 사회화가 된 탓인지 다른 견들(특히 수컷견들)을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고또 중성화수술을 한 상태이기도 해서 결혼, 새끼 다 물 건너간 거 맞았다. 그러나 나는 욱하며 소릴 높였다. "그런 단맛 쓴맛 필요 없거든!" 언니는 또 한바탕 깔깔댔다. 내가 자기 얘길 봄이 얘기로만 듣지 않고, 내 얘기로 듣고 발끈했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어쩜 그걸 노렸던 건지도...

그러고 보면 봄이랑 나는 공통점이 많다. 비혼, 비출산에, 점점 나이 들며 그만큼 활동반경이 좁아지고 있다는 것까지... 물론 다른 점도 많다. 그중 가장 큰 것은 봄이는 책을 볼 수 없지만, 난 책을 볼 수 있다는 것개는 인간처럼 연애 세포 부활에 일조할 로맨스 소설을 볼 수 없으니 인간보다 더 빨리 늙는 것일지도 모른다. 


난 회춘 중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소설 속 ‘세토야마’라는 고딩 남주에게 푹 빠져버린 이 순간만큼은. 과거 ‘욘사마’를 외쳐댔던 일본 할머니들의 심정이 지금의 나와 같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하이틴 로맨스를 읽다 보니 나의 하이틴 시절이 그리워지기라도 했던 걸까? 나는 소설에서 빠져나와 수년째 내 책장 맨 위에서 쿨쿨 자고 있던 먼지 쌓인 앨범을 꺼내 펼쳐보았다. 앨범 안에는 사진이 아닌 내가 중고딩 시절 받았던 편지들이 보관돼 있었다. 펼쳐놓고 보니 중학교 졸업식 전날 친구한테서 받은 편지에 눈길이 갔는데, 친구는 편지의 시작을 '달 보며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것 같은 ○○에게'라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있을 작별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너에게 빳빳한 편지지 보다는 찢어진 공책 한 페이지가 더 맞을 것 같아서... 우리 졸업해, 졸업하는구나... 

(중략) 넌 아니? 네가 좋은 애라는 거.. 넌 좋은 아이야. 하지만 변할까.. 변하려면 훗날 이담에 내가 기억할 수 있게 조금 조금만 변해라.. 네가 보고 싶을 거야.."

중학교 졸업식 전날(1993. 2. 10.) 친구가 나에게 쓴 편지


앨범 안에는 우정 편지뿐만 아니라 러브레터 같은 것도 포함돼 있었는데, 그중에는 편지와 함께 편지봉투에 위한 시를 적어놓은 것도 있었다.

 

"맑은 모습으로 어느 날 갑자기 내게 나타난 아이 / 작은 키에 청순하고 예쁜 모습을 한 어린 소녀 / 지나버린 아픈 상처가 내겐 아직 남아 있지만 모든 걸 회의적으로 느끼고 반성하며 살고 있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너 / 언제까지나 이대로이고 싶어라/

설명: 이 시 내가 지었는데 어떠니? 여지껏 내가 생활한 모든 걸 이 시에 함축시켰어. 



고1 때 날 좋아하던 또래 남학생이 건넨 시인데, 지금 와 보니 지나버린 아픈 상처 어쩌고 하는 대목이 좀 웃겼다. 어린 나이인데도 너무 인생 오래 산 사람처럼 문장을 구사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 친구는 자기가 나한테 이런 걸 건넸었다는 걸 기억이나 할까? 아마도 까맣게 잊었겠지? (어쨌든 이제는 아저씨가 되었을 그 친구가 이 글을 보는 일은 없기를) 

그때 친구를 이성적으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시절이 그립다. 손 편지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냥 생각만으로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누군가 내게 말하고 싶은 비밀이 무어냐고 한다면 그 시절의 추억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소설책으로 달달해진 다음, 나의 풋풋했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또 한 번 몽글몽글해졌으니 이제 나, 로맨스물에 다시 도전해 봐도 될까? 아니면 로맨스는 접어두고 곧 닥칠 갱년기나 염려해야 할까?? 

아.. 모르겠다!! 읽던 책이나 마저 읽고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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