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틴 로맨스 읽다가 나의 하이틴 시절로 돌아가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책을 읽는다"
영국의 소설가 '클라이브 루이스'가 했다는 이 말에 난 다음과 같은 한 줄을 보태고 싶다.
"우리는 (우리의) 연애 세포가 죽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도 책을 읽는다"
2년 전 나는 어쩌다 쓰게 된 로맨스 판타지물로 멘토링 프로그램이 있는 스토리지원사업에 참여했다가 멘토로부터 "장르가 로맨스인데, 로맨스가 없어요"라는 지적을 받은 바 있다. 그건 곧 단팥빵인데, 단팥이 없어요와 같은 말이었는데, 난 지적을 받은 후에도 단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단맛 본지 너무 오래라 달다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처럼 좀 헤맸다고나 할까? 헤매다 말았으니 좋은 결과물도 없었고, 로맨스물에 자신감이 확 떨어진 상태였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대형서점 많고 많은 책 가운데 《말하고 싶은 비밀》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온 건.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면 내 눈에 꽂힌 건 책 제목보다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설렘 폭발 연애 세포 충전 로맨스'라는 문구였다. 이 나이에 사춘기 애들 나오는 하이틴 로맨스 따위 읽고 설레겠냐? 하는 의심도 없진 않았지만, 난 곧장 그 책을 계산대로 가져갔다. 로맨스물에 재도전하려면 뭐로든 채워야 했다. 내 안에 달달한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비밀》은 평범한 여고생 구로다 노조미 앞에 불쑥 날아든 짤막한 러브레터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나는 40줄의 나이를 망각한 채 고딩 여주 노조미에게 제대로 감정 이입해 러브레터의 발신자인 학교 최고 인기남 세토야마에게 푹 빠져버렸다. 기대 이상의 수확이었다. 그러다 현실로 돌아온 건 책 보던 내 옆에서 널브러져 있는 봄이(울 집 댕댕이)에게로 눈길을 돌렸을 때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깨방정 떨던 아인데, 요즘 들어 가만히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싶은 게 내 청춘처럼 봄이의 청춘도 가는 중이거나 이미 가버린 것만 같았다.
올해 나이 10세, 사람 나이로 치면 50대 중후반.. 우리 집에 아기로 와서 이제는 내 나이를 훌쩍 넘어선 봄이... 그야말로 속절없는 세월인 거 같아 좀 서글픈 마음마저 들었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둘째 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다소 좀 쳐진 톤으로 "우리 봄이가 부쩍 늙은 느낌이야"라고 말했다. 언니는 새삼스러울 것 없다는 듯 "늙었으니까"라고 말한 뒤 "아이고, 인생의 단맛 쓴맛도 못 보고.. 결혼하고, 새끼 낳고도 못 해보고 늙어버렸네" 하며 웃는 것이 아닌가. 봄이는 사회화가 덜 된 탓인지 다른 견들(특히 수컷견들)을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고, 또 중성화수술을 한 상태이기도 해서 결혼, 새끼 다 물 건너간 거 맞았다. 그러나 나는 욱하며 소릴 높였다. "그런 단맛 쓴맛 필요 없거든!" 언니는 또 한바탕 깔깔댔다. 내가 자기 얘길 봄이 얘기로만 듣지 않고, 내 얘기로 듣고 발끈했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어쩜 그걸 노렸던 건지도...
그러고 보면 봄이랑 나는 공통점이 많다. 비혼, 비출산에, 점점 나이 들며 그만큼 활동반경이 좁아지고 있다는 것까지... 물론 다른 점도 많다. 그중 가장 큰 것은 봄이는 책을 볼 수 없지만, 난 책을 볼 수 있다는 것. 개는 인간처럼 연애 세포 부활에 일조할 로맨스 소설을 볼 수 없으니 인간보다 더 빨리 늙는 것일지도 모른다.
난 회춘 중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소설 속 ‘세토야마’라는 고딩 남주에게 푹 빠져버린 이 순간만큼은. 과거 ‘욘사마’를 외쳐댔던 일본 할머니들의 심정이 지금의 나와 같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하이틴 로맨스를 읽다 보니 나의 하이틴 시절이 그리워지기라도 했던 걸까? 나는 소설에서 빠져나와 수년째 내 책장 맨 위에서 쿨쿨 자고 있던 먼지 쌓인 앨범을 꺼내 펼쳐보았다. 앨범 안에는 사진이 아닌 내가 중고딩 시절 받았던 편지들이 보관돼 있었다. 펼쳐놓고 보니 중학교 졸업식 전날 친구한테서 받은 편지에 눈길이 갔는데, 그 친구는 편지의 시작을 '달 보며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것 같은 ○○에게'라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곧 있을 작별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너에게 빳빳한 편지지 보다는 찢어진 공책 한 페이지가 더 맞을 것 같아서... 우리 졸업해, 졸업하는구나...
(중략) 넌 아니? 네가 좋은 애라는 거.. 넌 좋은 아이야. 하지만 변할까.. 변하려면 훗날 이담에 내가 기억할 수 있게 조금 조금만 변해라.. 네가 보고 싶을 거야.."
앨범 안에는 우정 편지뿐만 아니라 러브레터 같은 것도 포함돼 있었는데, 그중에는 편지와 함께 편지봉투에 날 위한 시를 적어놓은 것도 있었다.
"맑은 모습으로 어느 날 갑자기 내게 나타난 아이 / 작은 키에 청순하고 예쁜 모습을 한 어린 소녀 / 지나버린 아픈 상처가 내겐 아직 남아 있지만 모든 걸 회의적으로 느끼고 반성하며 살고 있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너 / 언제까지나 이대로이고 싶어라/
설명: 이 시 내가 지었는데 어떠니? 여지껏 내가 생활한 모든 걸 이 시에 함축시켰어.
고1 때 날 좋아하던 또래 남학생이 건넨 시인데, 지금 와 보니 지나버린 아픈 상처 어쩌고 하는 대목이 좀 웃겼다. 어린 나이인데도 너무 인생 오래 산 사람처럼 문장을 구사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 친구는 자기가 나한테 이런 걸 건넸었다는 걸 기억이나 할까? 아마도 까맣게 잊었겠지? (어쨌든 이제는 아저씨가 되었을 그 친구가 이 글을 보는 일은 없기를)
난 그때 그 친구를 이성적으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 시절이 그립다. 손 편지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그냥 생각만으로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누군가 내게 말하고 싶은 비밀이 무어냐고 한다면 그 시절의 추억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소설책으로 달달해진 다음, 나의 풋풋했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또 한 번 몽글몽글해졌으니 이제 나, 로맨스물에 다시 도전해 봐도 될까? 아니면 로맨스는 접어두고 곧 닥칠 갱년기나 염려해야 할까??
아.. 모르겠다!! 읽던 책이나 마저 읽고 생각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