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에 불안이 스며들 때...
정신과 의사들이 '우울증'에 대해 논하는 유튜브 채널을 보게 되었다. 우울증 환자들이 '반추'를 많이 한다는 대목에서 귀가 쫑긋해졌다. 반추? 그거 나도 하는 건데, 하면서. 여기서 말하는 반추는 과거 있었던 '부정적인 사건'을 되풀이하여 생각함으로써 부정적인 감정을 강화하는 것을 말한다. 부정적인 감정이라 함은 우울, 불안.. 뭐 그런 것들이 되겠다.
부정적인 사건, 다시 말해 불편한 기억들은 주로 잠들기 전 적막한 상태에서 찾아든다. 안 좋았던 기억, 후회되는 일들을 곱씹노라면 과거로 돌아가 다시 좀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그럼 이 나이 먹도록 고생한 건 다 어떡하고?' 하는 생각에 곧 회귀의 꿈을 접기도 한다. 인생 2회차라 한들 사는 일이 만만할 리는 없지 않은가.
우울해서 반추를 하는 건지 반추를 해서 우울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반추라는 게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건 확실한 것 같다.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는 그것 때문에 어느 날은 괴롭기도 하니까. 그럴 때면 나쁜 기억은 밖에다 두고 좋은 기억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집을 상상하곤 한다. 그런 집이 있다면, 그런 집에서의 잠이란 얼마나 편안하고 달콤할까 하는 상상...
트라우마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남들과 견주어본 적은 없지만) 특별히 내가 더 부정적 사건을 많이 겪으며 살아왔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후회 없는 인생이란 없는 법이니 나 또한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뿐.
내 잠자리를 불편하게 하는 건 비단 과거의 일만이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야말로 잠자리를 불편하게 하는 불청객이 아닐 수 없다.
며칠 전 넷플릭스에서 〈맵고 뜨겁게〉라는 영화를 보았다. 나처럼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두러잉'이라는 미혼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였다. 母가 아닌 父母와 산다는 거, 나보단 젊다는 거, 나보단 많이 찐 몸이라는 거, 다소 자포자기 상태라는 거, 그렇게 나와 다른 점도 있었지만, 나는 두러잉에게서 나를 보고 있었다.
두러잉 동생이 두러잉한테 한 소릴 나한테 한 소린 줄 알았으니까.
두러잉 (여)동생: 지금은 부모님께 기댄다고 해도 더 늙어선 어쩔 건데?
애도, 남편도 없고 요양원에 면회 갈 사람 나밖에 없어!
잠자리에서 그 동생의 말이 반복재생됐다. 이것도 반추라면 반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다 보니 엄마도, 언니도, 오빠도, 우리 집 댕댕이도 신기루처럼 다 사라져 버리고 요양원 같은 곳에 나 혼자 남게 된 모습이 펼쳐졌다. 어쩌면 그건 생각이 아니라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불안이 수면을 잠식할 때 꾸게 되는 나쁜 꿈...
발밑에 있던 댕댕이가 위로 올라와 제 통통한 엉덩이로 내 얼굴을 건드리는 바람에 눈을 떴고―울 집 댕댕이는 내 침대에서 나와 같이 잔다―모든 것이 사라졌으니, 그건 꿈이었으리라.
나는 그런 꿈, 그런 불안을 누구한테 말해본 적은 없다. 얘기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이제라도 얼른 좋은 짝 만나 결혼하라는 말들을 해댈 테니까.
도처에 결혼하기 좋은 사람이 깔린 것도 아니고, 나 또한 좋은 짝이 되어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결혼이 불안을 줄여줄지, 결혼 후 생긴 관계들이 또 다른 불안을 안겨줄지도 알 수 없다. 당장 내 언니만 봐도 아들을 군대에 보내놓고 불안에 떨고 있다. 이 험한 세상에 사랑하고 책임져야 할 존재(남편이건 자식이건)를 만든다는 건
안 그래도 불안한 나 같은 인간이 섣불리 할 수 있는 일이 못 된다. 그러니 결혼 얘길랑은 안 해주셨으면 좋겠는데, 특히 어른들은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갖고 있는 고민 상당 부분이 결혼으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고민이나 불안을 끝장낼 방법이 결혼뿐이라면) 난 더 암울해진다. 내 나이가 되고 보면 원한다 해도 결혼이 쉽지 않은 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결혼하라는 말보단 "야, 요즘 비혼, 돌싱족들 많은데, 늙어서 혼자인 사람이 너뿐이겠냐? 걱정 마"라는 말이 더 위안이 될 것 같다. 분명 내 안엔 내가 혼자인데, 옆 사람도 혼자라면 괜찮을 것 같은 심리가 존재하니까. 나중에 늙어 홀로 요양원이나 실버타운 같은 데 가더라도 나의 룸메이트 또는 이웃이 심하게 자식 자랑하는 할머니는 아니길... 나는 소망한다.
가끔은 댕댕이가 위안이 되기도 한다. 그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고, 그 시간 개념 없는 눈망울을 보고 있을 때... 오직 인간만이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를 의식하며, 동물은 시간 의식이라는 게 없기 때문에 사실상 시간이 결여된 세계에서 산다고 하지 않던가. 하여 과거와 미래가 없는, 간식 언제 주나만을 생각하고 있는 듯한 댕댕이의 해맑은 눈을 보고 있노라면 내 눈, 내 머릿속에도 어느새 저 귀여운 댕댕이를 눈앞에 둔 현실만이 남는다. 그건 불안과는 거리가 먼 상태다.
그래, 현실만 보고 현실을 살면 될 일이다. 반추도, 미래 미리보기도 하지 말고. 잠자리에서 잠이 안 와 굳이 생각이란 걸 해야겠다면 쓰다만 소설의 뒷부분이나 생각하면 될 일이고..
현실을 사는 것 같아도 과거와 미래에 쓸데없이 너무 오래 머물렀던 나를.. 반추가 아닌 '반성'해 본다. 불안이 파고들지 않는 단잠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