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은 남편을 위한 것이었다?
형부가 좀 늦는다더니 혼자 심심했는지 큰 언니가 저녁에 맥주를 사들고 놀러 왔다. 내 방에서 언니와 내가 안주가 필요하네, 마네, 배달 음식을 시켜야 하네, 마네, 하며 시답잖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엄마가 들어왔다. 딸들 수다 떠는 거나 보자고 들어오신 것 같은데, 어느새 말하는 쪽이 엄마고, 우리는 듣는 쪽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듣게 된 얘기란 때아닌 '엄마 친구분(이하 가명 '송자' 아줌마로 지칭합니다)의 불륜 썰'이었다. 어쩌다 그 얘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얘기의 도입부부터 꽤 흥미로웠다.
엄마: 송자가 막 결혼을 해가지고 얼마 안 됐을 때 점을 보러 갔대, 인자 시누이들이랑 갔어. 긍께 점쟁이가 시누들 있는 데선 말을 못 하고 송자한테 언제 혼자 한번 오라고 하더라여..
나: 오~ 영업수완!
언니: 점쟁이, 장사 잘하네
엄마: (우리의 반응 따윈 신경 쓰지 않고) 그래가꼬 나중에 혼자 간께 점쟁이가 "아저씨(남편)가 명이 간당간당 하니 애인을 하나 두시오." 이러드라여.
나: (정색하며) 무슨 그런 말이 있어.
언니: 근데 아저씨 안 죽고 살아계시잖아. (엄마의 끄덕임에) 에이, 그 점쟁이 돌팔이네.
엄마: 돌팔이가 아니여, 송자가 애인 만나기 전에, 아저씨(남편)가 막 아파가꼬 금방 죽게 생겼었디야..
언니: 그래서 애인을 만들었어?
엄마: 꼭 애인을 만들라고 그런 건 아닌디 송자가 카바레를 한번 갔었는갑써, 근디 걱서 만난 남자가 송자 보고 반했는지 어쨌는지 집에까지 쫓아왔대, 가라 해도 쫓아오고, 쫓아오고... 몇 날 며칠을 그러드라여
나: 남편 있는 줄 알고도?
엄마: 응, 문 앞에 뭐 사다 놓고 가기도 하고... 한 3년을 그래가꼬 사귀게 되얐어. 글고난께 바깥양반이..
나: (퀴즈프로에서 정답 맞히듯) 건강해졌다?
엄마: 그래.
나는 빵 터졌다. 얘기가 너무 황당하게 흘러가서였다. 아내가 바람피워 병약한 남편이 건강해졌다는 게 말이 되느냐 말이다. 하지만 나의 이런 불신에도 얘기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됐다.
언니: 근데 남편은 송자 아줌마, 바람 난 거 몰랐지?
엄마: 몰라, 순진해가지고.. 송자 애인이 아저씨(남편)한테 형님이라고까지 하고...
나: 아, 둘(내연남과 남편)이 또 알아?
엄마: 그래, 근디 둘(내연남과 송자 아줌마)이 사귀는지는 몰라, 송자가 그 남자랑 전화 통화하고 놀러댕기고 그래도 남편이 '저 여자가 바람났구나' 그 생각을 못 해.
언니: 송자 아줌마 보면, 뭐랄까.. 남자처럼 좀 괄괄한 데가 있어. 만약 여성스럽고 잘 꾸미도 다니고 그랬으면 의심했을 거야.
엄마: 모르는 소리 하고 있네, 갸가 아저씨랑 같이 밭에서 일하다가도 그 애인이 보자고 전화하믄 하던 일 땡겨불고 집에 가서 씻고, 곱게 화장하고, 한복 입고 나가고 그랬단다.
나, 언니: 한복을 입고 가??
엄마: 애인이 춤추러 가자고 부른 건께
언니: 할머니들 가는 카바레는 한복 입고 가?
엄마: 한복 입은 사람도 있고, 드레스 입은 사람도 있고... 다들 춤추면 치마가 팔랑팔랑거리게 입고 댕겨.. 얼굴은 쪼글쪼글해도 입고 댕긴 것만 보믄 다 아가씨야..
엄마도 친구 따라 카바레라는 곳에 한두 번 가보긴 한 모양이었다. 춤출 줄을 몰라 그냥 남들 추는 거 보고만 오셨다는데, 그건 의심하지 않았다. 음주가무, 특히 '가무'를 즐기지 않는 나의 유전자가 엄마한테서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가 좀 순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도회장에서 춤추고, 교제하고, 애인을 만들기도 하는 그런 세계가 있는 줄도 모르고, '할머니, 할아버지들' 하면 관광버스 타고 꽃구경 가시거나, 탑골공원 같은 데서 바둑을 두시거나.. 떠올리는 거라곤 그게 다였으니까.
카바레가 어떻고저떻구 하다가 우리는 다시 엄마 친구 애인 얘기로 돌아갔다.
언니: 송자 아줌마, 아직도 그 애인이랑 만나?
엄마: 지금은 안 만나지.
언니: 헤어졌어? 왜? 애인 아저씨한테 다른 여자 생겼대?
엄마: 응. 다른 여자가 생겨가꼬 송자 떼어낼라고 아주 독살스럽게 굴었다냐.. 송자가 그 남자한테 약은 약은 다해대고 김치 다 담아주고 오만 것을 다 해줬는디...
언니: 그 아저씬 부인이 없었나 봐?
엄마: 있어.
언니, 나: (경악) 어?!!
언니와 나는 굉장한 반전이 있는 영화나 드라마 앞에서 보일법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엄마: (담담히) 있는 데도 그러고 돌아다녔어.
나: 부인이 있는 데도 애인 두고, 그 애인 차고 또 애인 만들고??
엄마: 그것이 아니고 부인하곤 이혼을 했제. 송자랑 만나는 동안에 헤어져부렀어. 송자랑 25년을 만났응께..
나: (귀를 의심하며) 25년? 송자 아줌마가 애인이랑 25년을 만났다고? 그것도 남편 모르게?
엄마: 그래
언니와 나는 또 한 번 경악했다. 25년은 부부간에도 긴 세월이 아니던가. 그런데 불륜으로 25년이라니!
엄마가 처음 송자 아줌마의 불륜 얘길 꺼냈을 때 좀 의아했다. 내가 기억하는 송자 아줌마는 묻지도 않은 남편 자랑을 막 늘어놓던 '남편 바보' 같은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송자 아줌마는 그런 식으로 남편에 대한 죄책감을 덜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점쟁이의 말도 죄책감을 덜기 위해 확대 해석하거나 너무 과하게 믿어버린 게 아닌가 싶고. 그래도 난 송자 아줌마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불륜은 물론 지탄받을 일이지만, 남편도, 애인도 없는 나에겐 그저 딴 세상 얘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남편 있는 유부녀에겐 애인까지 생기고, 수년째 싱글인 나에겐 남편은커녕 애인도, 남사친도 없는 이러한 '부익부 빈익빈' 현실이 유감스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