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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림 Sep 10. 2024

남편이 사가도 욕 안 먹는 과일

남편 없는 비혼이지만 '남편' 얘기해봅니다

나의 언니들이 결혼함으로써 생긴 나의 형부들은 성실한 사회인으로 다 괜찮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을 보고 ‘나도 저런 남편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나의 이상형은 우리가 보통 가지고 있는 ‘(다소 부정적 의미의) 남자에 대한 선입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나의 형부, 특히 둘째 형부는 “남자들이 원래 좀 그렇잖아”라고 할 때의 그 남자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엊저녁 둘째 언니와의 통화 때 오고 간 얘기도 여기에 해당했다.     


엊저녁 둘째 언니는 내게 전화를 걸어 형부한테 장보기를 시켰다가 낭패 본 썰을 풀었다. 


- 니 형부한테 브로콜리랑 과일 좀 사 오라고 했더니 브로콜리, 복숭아, 자두, 이렇게 세 가지를 사 왔더란 말이지. 근데 먹을 수 있는 게 한 개도 없는 거야.(헛웃음) 가게 사장이 좀 노래진 거라 5,000원짜리인데 3,000원에 준다고 해서 사 온 거라며 브로콜리를 내미는데, 색깔 보니까 이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바로 버렸지. 자두 상태도 절반은 상한 것도 아니고, 안 상한 것도 아닌 요상한 상태야. 그래도 잘 씻어 놨는데 애들이 안 먹어. 그래서 또 버리고... 복숭아도 물러터진 거 사와서 다 버리고... 3만 몇 천 원어치를 사가지고 온 건데 다 버렸어.. 


- 형부한테 화 안 냈어?


- 화 안 내고, "아이고 그 집에(과일가게에) 좋은 일 해줬다" 그랬지 뭐.. 


- 우와∼ 그러기 쉽지 않은데? 


- 화내고 짜증내서 뭐 해, 이미 사 왔는데.. 그리고 그 가게 사장도 좀 팔아야지.(웃음) 


나는 언니한테 "앞으로 웬만하면 장보기는 형부 시키지 말고 너가 해"라고 말해주었는데,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그 반대로 말해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안 사다 사니까 그런 거야. 여러 번 사다 보면 좋은 거 보는 안목 생기겠지.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형부 시켜" 이렇게.


다음날(오늘) 동네 커피숍에서 아아를 홀짝이며 창밖을 보는데, 맞은편에 있는 ◯◯마트 과일 매대 위 현수막에 남편이 사가도 욕 안 먹는 과일이라고 써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색이 많이 바랜 것으로 보아 꽤 오래전부터 걸려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오늘에서야 그걸 보았고 엊저녁 언니와의 통화가 아니었다면 오늘도 눈여겨보는 일은 없었으리라. 나중에 안 거지만 아빠 버전(아빠가 사가도 욕 안 먹는 과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아빠든 남편이든 과일 잘 못 사 가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으면 저런 현수막을 걸었을까 싶었다. 남녀 사이에 요즘 많이 가사 분담이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하나 주방 일은 여전히 아내 몫이 크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기도 했고. 평소 가족들의 식사 준비를 위해 장보기뿐만 아니라 직접 식재료들을 씻고 다듬으며 주방에서 시간을 보내본 남편이라면 채소나 과일을 잘 못 살 리 없을 텐데(있더라도 희박한 확률로 있을 텐데), 그런 남편들이 희소하니 저런 현수막이 걸리지 싶었다고나 할까. 


울 언니도 집안일(요리, 청소 등등)엔 젬병인 형부 때문에 독박 가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형부를 탓할 일만은 아니다. 형부가 못 미더워 시키고 싶지 않고, 시켜놓고도 결국은 자기 방식대로 하느라 두 번 일하게 된다며 그냥 집안일은 자기가 하는 게 편하다는 언니니까. 이로써 형부는 못 해서도 안 하지만 안 해서 더 못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과일을 잘 못 사는 남편들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혼녀이긴 하나 집안일엔 별 쓸모없는 (남의) 남편들을 보며 결혼 안 하길 잘한 거라며 위안 삼고 싶진 않다. 하여 이 말을 하고 싶다. 


"남편들이여! 뭐든 자주 하다 보면 느는 것이 아니겠는가! 브로콜리 사는 것도. 복숭아 사는 것도."      


끝으로 형부에게 맛 간 과일을 팔아치운 가게 주인한테도 한마디 하고 싶다.


"남편이 사가도 욕 안 먹는 과일집이 되어주세요. 그래야 자주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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