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퀴즈를 본 게 아니라, 나를 보고 있었다

‘수박 농사짓다 52세에 우주공학자가 된 공근식 박사’ 편을 보고

by 춘림

거실에서 TV를 보시던 엄마 옆에 앉았다가,

오랜만에 유퀴즈온더블럭을 함께 보게 되었다.

유명 배우가 나와도, 스타 강사가 나와도 잘 보지 않는데

‘수박 농사짓다 52세에 우주공학자 된 공근식 박사’는 나의 눈을 붙잡았다.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엔, 그리고 그걸로 성공하기엔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요즘 자주 드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화면 속에는, ‘늦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다.


열여덟 고교 자퇴 후 수박 농사를 지으며 살던 그는

어느 날 대전역에서 야학 개강 안내문을 우연히 보게 된다.

그날 이후 10년 만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무려 5년 동안 결석 한 번, 지각 한 번 없이 야학에 다녔다고 했다.

그 후 세 곳의 대학을 다니며 주경야독을 이어가다

42세에 노벨상 수상자를 다수 배출한 러시아 최고 학교에 입학해 러시아 유학을 떠나게 된다.

퇴학과 재입학이라는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잠도 못 자고 이가 빠질 정도로 열심히 공부한 끝에

그는 결국 수석 졸업 타이틀에 박사학위까지 거머쥔다.

정말이지 드라마 같은 이야기였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힘을 얻게 될 줄 알았다.

과거의 나였다면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도 열심히 하면, 언젠가 꿈을 이룰 수 있겠지.’

하지만 ‘대단하다’는 감탄과 동시에,

‘나와는 매우 다른 사람’이라는 거리감이 들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보다 나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물리를 사랑했다고 했다.

나는, 뭔가를 그렇게까지 사랑해 본 기억이 없다.

무언가에 몰입해 몸을 갈아넣을 만큼 열중한 기억이 별로 없다.

다만 회사 다닐 때, 하기 싫은 일을 하며 몸을 갈아넣은 적은 있다.

그건 몰입이 아니라 소진이었다.

그는 하루에 세 시간만 자고 공부했다고 했다.

나는 세 시간만 자고 공부해 본 적이 없다.

40년 넘게 살아오며 그래본 적 없다는 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전에는 노력과 열정이 거의 모든 걸 결정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타고남의 비중을 무시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이,

오직 의지 하나로 농사를 짓다 50대에 우주공학 박사가 되는 일은…

현실에선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노력조차도 타고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노력도 못하는 인간이야”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성공하기에 필요한 조건들을 타고나지 않은 쪽에 가깝다는 걸

이제는 인정하는 것뿐이다.

이것은 자기 비하가 아니라, 그냥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다.


그렇다고 공근식 박사의 이야기에서 내게 없는 것만 발견한 건 아니다.

그가 한 말 중,

“외로워서 공부를 시작했다”는 말이 이상할 정도로 깊이 박혔다.

나는 그 순간,

그의 천재성이나 성취보다 그 외로움에 먼저 가닿았다.

외로움, 결핍, 고요한 욕구... 그건 나도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충분히 오래, 깊이, 나를 물들이고 갉아온 감정들.

그와 내가 닮은 점이 있다면 무언가를 향한 뜨거움이 아니라,

무언가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오래 안 채로 살아왔다는 것.

그러니까… 나는 그의 천재성은 가질 수 없지만, 그의 외로움은 이해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다시 시작해 볼 힘을 찾는다면 어쩌면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나도 뭔가를 시작은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뜨겁지 않아도, 타고나지 않아도, 천천히, 조용히, 나만의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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