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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살이 첫날, 풀옵션은 어디 가고 문제집만 있다

명자 시리즈 ep.04

by 춘림

명자는 침대까지 있는 풀옵션이라는 말에 월세 계약을 감행했다.

그런데 이사 3일 전, 부동산 직원이 전화를 걸어왔다.

“집주인 말씀이, 침대 서랍장이 고장 나 있는데 곧 고쳐주신대요. 그전까진 쓰지 말고 계시래요.”

명자는 네, 하고 대답은 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세입자가 나가고 입주까지 3~4일의 텀이 있는데,

그 사이 못 고칠 이유가 뭘까? ‘곧’이라는 단어가 벌써 불길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사 당일,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고장이 아니라 ‘망가짐’ 그 자체였다.

서랍장은 비틀려 있었고, 매트리스는 앉을 때마다 팅팅 스프링이 튀어 허리디스크를 예고했다.

명자는 위층 사는 집주인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랍장은 언제쯤 고쳐주실 수 있을까요?”

“아, (고칠) 누가 와야지… 당분간은 못 쓸 것 같아요. 지금은 안 쓰는 게 좋을 것 같애.”

“혹시 새 걸로 바꿔주실 수는 없나요?”

“새 걸로? 그건 안 되지. 다른 세입자들은 다이소에서 바구니 사다가 붙박이장 밑에 두고

위에 옷 걸고 그냥 쓰던데…”

명자는 잠시 말이 막혔다. 부동산을 통해 들었던 “곧 고쳐주겠다”는 말은 어느새

“다른 사람도 서랍장 없이, 혹은 망가진 채로 그냥 그렇게 산다”로 바뀌어 있었으니까.


문제는 침대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은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달라붙는 것처럼 끈적거렸다. 음식물 얼룩까지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방… 그냥 쓸기만 하신 거죠?”

명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 다 닦았어요.”

“근데 바닥이 너무 끈적거리고 얼룩도 그대로인데요.”

“아, 그게 청소를 해놓고 도배를 했거든. 그러면 청소 아줌마 보고 다시 해달라 할게요. 내일 시간 괜찮아요?”

잠시 희망이 피어났다가 곧 사라졌다. 집주인아주머니가 금세 말을 바꿔

“어… 근데 본인이 닦으면 안 돼요?”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제가요?”

“어, 본인이.”

“아, 네...”

그리고 몇 분 뒤, 집주인 부부가 명자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줌마는 백발의 남편을 대동했다. 고령의 남편은 밀걸레를 들고 낑낑대며 바닥을 닦으려 했다.

명자는 결국 만류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닦을게요.”

“그래요, 그럼.”

부부는 유유히 사라졌다.

집주인은 입주 전 분명히 말했다. 청소업체를 불러 깨끗이 해놓겠다고.

물론 그건 선심이 아니었다. 나갈 때 세입자가 내는 청소비 10만 원으로 충당하는 구조였다.

‘청소비를 세입자가 내는데, 청소는 또 왜 세입자가 하게 되는 거지?’

서울살이는 산수보다 어려운 계산을 요구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1층 주차장 뷰.

창문을 열면 언제든 차주와 눈이 마주칠 수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명자의 일상을 생중계처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창문을 닫고 살 수도 없었다. 여름은 길었고, 환기는 생존이었다.

명자는 머리를 굴렸다. 창문에서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 파티션을 세우면 어떨까.

창문과 파티션 사이가 일종의 ‘가짜 베란다’가 되는 셈이다. 그러면 바람은 통하고, 시선은 차단된다.

그날 명자는 알았다.

불편을 덜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 보면, 이상하게도 머리가 좋아지는 기분이 든다는 것을.

서울은 명자에게 생활고(?)와 함께 두뇌 훈련을 선물했다.

끈적한 바닥과 망가진 서랍장, 주차장 뷰와 함께, 명자의 IQ는 조금씩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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