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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경한 지 15일째

늦은 건 늦은 거다 vs 1시간 30분의 헌신

by 춘림

상경 12일째 되는 날,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친구가 말했다.

“케데헌 성지 낙산공원 가자. 혜화역 2번 출구에서 보자.”


비가 왔다. 약속을 취소할까 하다가 “비 좀 온다고 인생 멈추냐?”는 알 수 없는 패기를

등에 업고 우산을 챙겨 나왔다.


혜화역에 도착했을 때 카톡이 울렸다.

— 다 와서 막히네ㅠㅠ 좀 늦어

— 주글래?

익숙한 패턴이었다. 친구는 ‘지각 전문’, 나는 ‘분노 조절 실패자’.

오랜만에 보는데, 인간이란 잘 변하지 않는다.

다시 카톡.

— 비 와서 막히잖아, 일찍 출발했는데

— 5분 이상 못 참아, 술 니가 사

— 나는 지금 1시간 30분 걸려서 이동해주고 있다

나는 두 정거장을 왔을 뿐이고, 그녀는 상암에서 1시간 반을 달려왔다.

사실 그녀가 고생한 건 맞다. 그래도 “미안” 한마디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기다린지 십여분이 지났을 때

결국 버스에서 내린 그녀가 “니가 좀 이쪽으로 걸어와” 한다.

비가 오니 전철역 안에서 보기로 해놓고, 우산 쓰고, 저를 찾아 걸어오라니...


7, 8분을 걸어 만나자마자 우리는 또 아웅다웅했다.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왔는데!”

“늦은 건 늦은 거지.”

누가 봐도 싸움 구도는 ‘교통체증 vs 습관적 지각’. 판결이 나지 않을 재판이었다.

우리는 그냥 웃음으로 이 싸움을 종결했다.


친구가 나를 혜화역 양꼬치 맛집이라는 곳으로 이끌었다.

이름은 나중에야 알았다. ‘혜화양육관’

맥주를 시켰고, 안주로 양꼬치, 고수무침, 가지튀김, 매운 바지락볶음을 주문했다.

양꼬치, 고수무침은 성공적! 가지튀김, 매운 바지락볶음은 (우리의 입맛 기준) 실패!

어쨌든 오랜만에 친구와 가진 술자리는 좋았다.


술잔이 비었을 즈음 친구가 계산하겠다고 했다.

“진짜?” 하고 내가 반색하자, 그녀가 말했다.

“원래 살 생각이었어. 근데 네가 아까 카톡으로 ‘술 니가 사라’ 해서 기분이 좀 상했지.”

다시 설전이 붙었지만, 계산대 앞에서 승패는 무의미했다.

친구가 술값을 내는 순간, 내 전투력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8시 반. 우리는 낙산공원 계단을 올랐다. 서울의 야경은 젖어 있었다.

그녀는 가파른 계단을 가볍게 뛰듯 올라가는데, 나는 숨 넘어가는 소리를 효과음처럼 깔았다.

인생도 비슷했다. 그녀는 안정적으로 올라섰고, 나는 늘 힘에 부쳐 내려왔다.

다 올라섰을 때 길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왔다.

낙산공원의 마스코트라며, 친구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고양이는 피하지 않고 쓰담쓰담을 허용했다가, 금세 옆길로 새더니 풀을 씹기 시작했다.

마치 “너희가 간식 안 줘서 내가 이 꼴이다”라며 시위라도 하는 듯했다.


‘나… 인생을 잘못 살아온 걸까?’
불현듯 든 생각이었다.

친구는 안정된 직장과 번듯한 수입을 갖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불안정하다.
내가 창작에 들인 시간들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손쉽게 “낭비” 판정을 받는다.

사람들은 남과 비교하지 말라지만, 비교하지 않으려 해도 세상은 친절하게 통장 잔고로 순위를 매겨준다.
돈이란 놈은 거만하게도 모든 대화의 최종 심판자처럼 앉아 있다.

옆에서는 고양이가 계속 풀을 씹고 있었다.
나도 씹어 삼키는 중이었다. 비교와 자책을. 그 맛은…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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