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계굴은 역사 속 비극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지켜야 할 기억의 자리다
내가 곡계굴을 다시 찾은 것은
KBS에서 30년 동안 시사프로그램을 해오며
수많은 현장을 지나온 끝에,
마지막으로 ‘내가 남겨야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던 때였다.
내가 만든 방송의 제목은
〈끝나지 않은 전쟁, 곡계굴〉.
그리고 그 방송은
내 고별 방송이기도 했다.
주제는 분명했다.
“곡계굴에 맺힌 한(恨)”
1951년 1월,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전쟁을 피해 굴 속으로 피신한
약 400여 명의 주민과 피란민들.
아이를 업고 들어간 어머니들,
가족의 손을 꼭 잡은 사람들,
전쟁은 이들에게 선택을 주지 않았다.
단지 살고 싶다는 마음만이
그들을 굴 속으로 이끌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생의 바람은 허락되지 않았다.
미군 폭격기 4대, 16시간의 네이팜탄
미군 폭격기 4대가
곡계굴 입구를 향해 무차별 폭격을 시작했다.
불은 터지는 것이 아니라,
숨을 파고들며 번졌다.
네이팜탄은
공기를 태우고
피부를 태우고
숨을 태웠다.
굴 안에는 울음도 비명도 오래 남지 않았다.
소리 내는 것이 곧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360명이 사라졌다.
이름도, 마지막 말도 남기지 못한 채.
6대째 이곳 영춘에서 살아온 사람의 증언
유족 조병규 씨는
곡계굴에서 6대째 뿌리를 둔 사람이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내 아버지, 고모, 동생…
네 식구가 그날 굴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의 말 속에는
탄식도 외침도 없었다.
그저 평생을 견뎌왔던 마음의 무게가 있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하는데…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세 번, 네 번 되뇌었다.
전쟁은
총성이 멎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기억하지 않는 순간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진실은 규명되었지만, 구원은 오지 않았다
참여정부는 곡계굴 사건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대상으로 올렸다.
조사팀은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임을 공식 확인했다.
그러나
유족들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보상도, 사과도, 설명도,
국가의 위로조차 없었다.
역사는 기록되었지만,
슬픔은 여전히 유족 개인의 몫이었다
나는 방송을 준비하며
유족들과 함께 씻김굿을 진행했다.
울음은
말보다 먼저 터져 나왔고,
말보다 오래 남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슬픔이란 것은
세월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질 때 비로소 흘러가는 것임을 배웠다.
굿판에서 울던 한 유족은 말했다.
“우리는 탓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저…
기억해달라는 겁니다.”
그 말은
내 가슴을 붙잡았다.
나는 왜 이 방송을 고별 방송으로 선택했는가
30년 동안
나는 약자의 목소리,
외면당한 사람들의 이야기,
누군가에게는 사소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의 전부였던 이야기들만
붙잡아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에 남겨야 할 말은
이 한 문장이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기억하지 않는 순간
슬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반복된다.
곡계굴에서 죽은 사람들은
숫자가 아니라
이름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삶이 있었고,
웃음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그들을 기억하는 일은
추모가 아니라
책임이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곡계굴의 어두운 통로와
그을음의 질감을 떠올린다.
그 굴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무엇을 잊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리고 나는
내 마지막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