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어쩌다 아버지가 되었을까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먼저 사랑을 배우는 일이다

by 최국만


나는 어느 날 문득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나는 어쩌다 아버지가 되었을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아온 세월 속에서

아버지라는 자리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 같지만,

사실 그 ‘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맞이하는 데에는

평생이 걸린다.


IMF 이후, 아버지의 위치는 점점 좁아졌다.

가정에서는 말수가 줄고,

회사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몸을 낮춰야 했고,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아버지는 어느새 ‘어색한 손님’이 되어갔다.


나는 이런 시대에

아버지를 다시 바라보는 방송을 만들자고 결심했다.

후배 PD, 작가들과 함께

3부작 특집 프로그램 〈아, 아버지〉를 기획했다.

부제는 명확했다.


“아버지가 이 시대의 주인공입니다.”


아버지라는 존재의 근원,

가정 안에서의 역할,

왜 아버지가 무너졌고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조용히,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다.


취재 중 우연히 발견한 ‘아버지학교’


국내외의 자료를 검토하던 중

우연히 한 종교재단이 운영하는 아버지학교를 알게 되었다.

주 1회, 3시간씩, 5주간 진행되는 프로그램.

그 안에는 ‘아버지의 회복’에 대한 진지한 시도가 담겨 있었다.


종교 색채만 제거하면

우리가 기획하고자 하는 내용과 거의 동일했다.

그래서 담당 장로를 찾아가 취재를 요청했다.

그는 내 말을 잠시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최PD 님도 아버지시잖아요.

먼저 와서 듣고, 느끼고, 그다음에 취재하시면 어떨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취재자 이전에 나는 한 명의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이유를 쓰는 시간


아버지학교 첫날,

강의실에는 약 30명의 중년 남성이 모였다.

회사에서는 팀장이었고,

사회에서는 어른이었지만,

가정에서는 말수가 줄어든 ‘아버지들’이었다.


첫 번째 소그룹 과제는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이유 10가지 쓰기.”


그 순간 강의실은 어색한 정적에 잠겼다.


“우리 아들은 사랑할 게 없어요. 맨날 게임만 합니다.”

“중학교 들어가고 나서 말도 안 해요.”

“성적도 바닥이고, 맨날 반항만 해요.”


많은 아버지들이

자기 자녀에 대한 불만만을 말했다.


그러나 그건 ‘사랑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펜을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고는 적기 시작했다.

1. 아침에 눈을 뜨고 살아 있는 아들을 볼 수 있어서 고맙다.

2.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모습만 봐도 사랑스럽다

3. 듬직하고 목소리를 나를 닯아서 사랑스럽다.

4. 잘 먹는 모습을 보면 그냥 든든하다.

5. 내 인생에 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소중하다.

6. 나의 부족함을 통해 그 아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7. 휴일날 건강한 모습으로 친구들과 놀러 나가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8. 내가 못 이룬 꿈을 대신 이루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꿈을 찾는 모습을 보며 더 사랑하게 된다.

9. 아들이 나를 ‘아버지’라고 불러주는 것만으로 나는 이미 행복하다.

10.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단 하나의 존재라서 사랑한다.


적다 보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주변 아버지들도

손끝을 떨며 천천히 적기 시작했다.


그날,

아버지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문장으로 마주했다.


방송 후, 시청자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1부 방송이 나간 다음 날

KBS 시청자 게시판에는

놀라울 만큼 많은 글이 쏟아졌다.


“가족들이 다 같이 안고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왜 아버지가 되었는지,

그 이유를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사랑하는데 표현을 못 했던 거였네요.”


그 반응은 내 방송 인생 30년 중

가장 뜨거운 순간이었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그날 갑자기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2부와 3부까지 무사히 방송을 마치자

우리 가족이 다니던 교회에서도

“우리도 아버지학교를 열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나는 당연히 참석했다.

이번엔 취재자가 아니라

정말 한 명의 아버지로서였다.


마지막 날, 가족들이 모두 모였다.

바로 세족식이 있는 날이었다.


세족식에 앞서,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바로 ‘자클린의 눈물’이었다.

슬픔과 회한이 담긴 음률이 강당 전체를 감쌌다.


아버지들이 자녀에게 쓰는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너를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야.

방법을 몰랐을 뿐이야.”


순간,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사랑했는데, 왜 우리는 몰랐을까.”

“아버지가 저런 마음이었구나… 우리 아버지는 참 훌륭한 분이네.”


그 울음은

상처가 녹는 소리였다.


아내의 발을 닦는 순서다.


이어서 세족식이 진행되었다.

남편들은 조용히 세수대야에 물을 떠왔다.

나 역시 물을 받으러 걸어가는 순간부터

가슴이 뜨겁게 올라왔다.


아내가 의자에 앉았다.

사회자의 말이 울렸다.


“평생 가족을 위해, 자식을 위해 고생한 아내의 발을 닦아드리십시오.

그동안의 모든 감정을

이 물과 함께 흘려보내십시오.”


나는 결혼 후 처음으로

아내의 발을 마주했다.


23살 꽃 같은 나이에 나를 만나

함께 울고 웃으며 견뎌온 아내의 발.

세월의 풍파에 굳은살이 배고

발뒤꿈치마저 거칠어진 발.


나는 그 발을 천천히 닦았다.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외로웠을까.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여보… 미안해.

그동안 이렇게 힘들었네.

앞으로 내가 더 많이 사랑할게.”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눈물은

우리 둘 사이의 오래된 오해와 침묵을

부드럽게 지워갔다.


세족식이 끝나자

사회자가 말했다.


“서로를 포옹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나누십시오.”


그날,

아버지들은 다시 가족이 되었고

가족들은 아버지를 다시 품었다.


나는 그날, 다시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학교 취재를 마친 뒤

나는 알았다.


사랑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사랑은

그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조용한 배려다.


아버지는 ‘가장의 권위’가 아니라

가족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길은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길이다.


나는 그날,

취재자가 아니라

비로소 한 명의 아버지로 졸업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