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게 깨달은 고마움에 대하여
요즘 나는 자주 멈춰 서서 생각한다.
앞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보다,
지금까지 무엇을 함께 지나왔는지를.
2026년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나에게 가장 또렷하게 떠오르는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아내다.
아내의 60년은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많은 선택과 인내로 이루어지는지를
말없이 보여준 시간이었다.
사람마다 사연이 있다고들 말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그 사연을
아내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왔다.
가족을 위해, 가정을 위해,
그리고 때로는 나를 위해
자신을 뒤로 미루는 선택을 수없이 해왔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아내는 늘 조용한 중심이었다.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흔들리지 않게
가정을 지탱해 왔다.
27년의 직장 생활과
거의 20년에 가까운 나의 부재 속에서도
집이라는 공간을 ‘머무를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준 사람.
그 정성과 사랑을
어떤 말로도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내 환갑을
중국 서안의 화산 정상에서 맞았다.
천지 사이에서 아내와 함께 서 있던 그 순간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때는 몰랐다.
그 시간이 언젠가
아내의 환갑을 떠올리게 하는 기준이 될 줄은.
이제 아내의 60년이 다가온다.
올해 초부터 나는 여러 계획을 세웠고,
작은 이벤트들을 구상했다.
하지만 삶은 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
계획은 바뀌었고,
아내는 막내딸이 있는 독일로
친구들과 함께 한 달을 보낸다.
남편을 두고
여자 셋이 떠나는 유럽 여행.
이상하게도 나는 불안하지 않다.
오히려 기대가 된다.
그 시간이 아내에게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누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PD로 살아온 30년 동안
나는 늘 무언가를 기획해왔다.
이번만큼은
그 모든 경험을
아내를 위해 쓰고 싶다.
여행 경비부터 동선,
볼거리와 먹거리까지.
아내가 단 하나도 걱정하지 않도록
치밀하게 준비하는 일조차
나에게는 이미 기쁨이다.
이번 여행은
아내에게 사유의 시간이 될 것이다.
삶을 다시 바라보고,
앞으로의 시간을 상상하는 시간.
나는 안다.
아내는 그런 시간을 통해
더 단단해지고, 더 자유로워질 사람이라는 것을.
아내의 60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제는 누군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마음껏 살아도 되는 시간.
나는 그 곁에서
조용히 축복하고 싶다.
앞장서기보다는 함께 걷는 사람으로,
말하기보다는 들어주는 사람으로.
삶의 기쁨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요즘의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시간을 기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것이라고.
당신의 60년 앞에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