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한 편을 만들기 위헤 PD가 견뎌야 했던 밤들
아내의 침실에서는
조용한 코고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 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내 귀에 닿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책을 펼친 뒤
나는 같은 자리에 앉아
계속 읽고 또 읽고 있었다.
목이 칼칼해졌고
온몸이 저려왔다.
잠시 물이라도 마시려고 일어서는 순간,
코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손으로 만져보았다.
코피였다.
그때 울린 알람 시계가
새벽 세 시를 알리고 있었다.
저녁 식사 이후
무려 여덟 시간 넘게
나는 한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거실 문이 열렸다.
잠귀가 밝은 아내가
이내 깨어 나왔다.
“여보, 왜 아직까지 안 자?”
“손에 그건 뭐야… 피잖아.”
“아냐, 그냥 책 좀 보다가.”
“무슨 수험생도 아니고
내일도 있는데 왜 밤을 새워.”
“어서 씻고 자.
내일 출근 안 해?”
아내는 안다.
내가 방송을 대하는 방식을.
나는 교양 PD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PD가 감당해야 할 준비는
자료 몇 권 읽는 수준이 아니다.
공부의 양은
체력과 생활을 함께 깎아 먹는다.
2015년,
광복 7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를 맡았다.
충주 출신 독립운동가
류자명 선생이었다.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활동한 농학자.
그분의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류자명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다른 글
〈고국은 멀었지만 마음은 닿았다〉에서
소개한 바 있다.
오늘은
그 다큐멘터리가
시청자에게 전달되기까지
PD가 감내해야 했던
방송 준비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해외 취재는
돈이 많이 든다.
편성에 따라
취재 기간이 정해지고,
시리즈로 제작되면
체류 기간은 길어진다.
제작비는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올라간다.
그 돈의 대부분은
시청자가 낸 시청료다.
시청료.
얼마나 귀한 돈인가.
그래서
한 푼도 가볍게 쓸 수 없다.
류자명 다큐멘터리 역시
최종 제작비는
수천만 원이 들었다.
광복 70주년에 맞는
우리 지역 독립운동가.
그 이름을
류자명으로 정하기까지
나는 수없이 망설였다.
정말 독립운동을 했는가.
후대에 귀감이 되는가.
지금 다시 꺼내도
부끄럽지 않은 인물인가.
그분이 다닌 초등학교부터
중국으로 떠나기 전
국내 활동까지
하나라도 놓칠 수 없었다.
아침에 두 시간쯤 눈을 붙이고
출근 준비를 하는데
아내가 말했다.
“여보, 중국 가려면 아직 한 달 남았잖아.
취재 가기도 전에 쓰러지겠어.”
“체력 안배 좀 하고,
끼니는 절대 거르지 말고.”
전날 밤을 설친 탓인지
눈은 토끼눈처럼 빨갰다.
출근하자마자
기획회의가 시작됐다.
“최 PD님,
국내 방송 VOD를 다 찾아봤는데요…
이미 M 방송국에서
3부작으로 거의 다 다뤘습니다.”
앞으로 다섯 달을 함께할 작가,
이민아 작가의 보고였다.
고민이 묻어 있었다.
하루가 아까운 시간.
초 단위로 판단해야 하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막내 후배가
나를 위로했다.
“국장님,
자료 읽다 코피까지 흘리셨다면서요.
저희도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그때 나는
편성제작국장이었다.
열정으로 버티는 후배들을 보며
결국 결심했다.
보름간 국을 비우고
해외 취재를 가기로.
충주, 대전, 문경, 서울.
사전답사가 이어졌다.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교수를 만났다.
“교수님, 도와주십시오.”
“아이고, 최 국장님이
저보다 더 많이 아시네요.”
자료 검색,
관련 도서 독파,
사전답사,
교수 면담,
생가 확인,
후손 인터뷰,
국립묘지,
보훈처 훈장 확인까지.
한 달 동안
철저하게 검증했다.
방송 이후의 파장까지
모두 계산했다.
최종 가원고가 나왔다.
이제 남은 것은
영상이었다.
영상이 없는 부분은
그래픽으로,
일부는 KBS 아카이브로
보완하기로 했다.
해외 취재 예산이 확정됐다.
14박 15일.
아무리 준비해도
현장은 늘 다르다.
PD는
그 가능성까지
미리 고민해야 한다.
우리 취재팀은
베이징으로 향했다.
시청자는
그 모든 과정을
알지 못한다.
알 필요도 없다.
다만
우리는 안다.
한 장면의 다큐멘터리 뒤에
얼마나 많은 밤과
얼마나 많은 코피와
얼마나 많은 망설임이
쌓여 있는지를.
그래서
공영방송의 PD는
시청자를
‘손님’이 아니라
‘왕’으로 모신다.
그 왕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새벽 세 시까지
책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