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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시간에는 냄새가 있다

기억은 향기로 돌아온다.시골 냄새를 통해 되살아나는 추억과 삶의 잔향

by 최국만

노년의 시간에는 냄새가 있다.

그 냄새는 눈에 보이지도,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문득문득 살아온 날들을 데려오는 조용한 메신저다.

이제는 무엇 하나도 예전 같지 않은 이 나이에,나는 후각이라는 감각이 때때로 기억보다 더 선명하게 과거를 꺼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침마다 열어젖히는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풀 내음.

그 풀냄새 속에는 내가 괴산으로 귀촌한 첫해,밭을 일구며 흘린 땀방울이 섞여있다.

아내와 함께 고랑을 만들고,고추 모종을 심고,잡초를 뽑던 그 날의 햇살과 허리 통증,그리고 땅의 숨결이 그 냄새 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 시절은 젊지 않았지만 ,삶이 다시 시작되는 듯한 희망의 냄새가 분명히 있었다.


장독대 옆에서 퍼져나오는 된장과 간장의 익은 향은 어머니의 손끝에서 시작된 기억이다.

어릴 적 부엌 귀퉁이,아궁이 위에서 끓던 된장찌개의 냄새는 지금도 기다림으로 되돌려 놓는다.

젓가락을 들고 부엌 문틈으로 서성이던 아이,말없이 숟가락을 내어주던 어머니,

그 모든 것이 된장냄새에 살아 있다.


그 냄새는 어쩌면 나에게 ‘가족‘이라는 단어보다 먼저 배운 사랑의 언어였는지도 모른다.


비 오는 날의 흙냄새는 노년이 되어 더욱 깊이 배어든다.

젊었을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흙의 숨결이,이제는 비가 땅에 두드릴 때마다 내 폐 깊숙히 스며든다.

그 흙냄새를 맡을 때면 ,나는 취재 촬영차 지리산 자락을 오르내리며 야생의 냄새 속에 서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죽어 있는 뱀의 살내음,올무에 걸린 토끼의 젖은 털,

인간의 탐욕과 생명의 경계 사이에 피어오르던 냄새들.

그때 나는 냄새를 통해 생명의 무게를 처음 알았다.


아내의 냄새도 있다.

수십 년을 함께 살아도 ,나는 종종 아내의 체취를 느낀다.

아내가 나무 밑에서 김을 메고 돌아올 때 풍기는 흙과 땀의 냄새,

부엌에서 국을 끊이며 입가에 맺히는 소금기 어린 땀냄새,

병원 침대 위에서도 사라지지 않던 아내 만의 따뜻한 냄새.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위로한다.

노년의 사랑은 눈빛이나 말보다 오히려 냄새에 가까운 것 아닐까.

눈에 띄지 않지만 ,언제나 곁에 있고,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으며,문득 그리워지는.


노년은 감각이 무녀진 시기가 아니라,감각이 다시 정직해지는 시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젊을 때는 바빠서,혹은 너무 뻔해서 지나쳤던 냄새들이,

기억의 문을 두드리고,

나를 내 삶으로 되돌려 놓는다.


나는 오늘도 괴산의 한적한 마을 길을 걷는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공기엔 구수한 연탄 냄새가 실려오고,사과나무 아래에서는 잘 익은 과일 냄새가 서성인다.

그 냄새들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당신은 오래 살았고,그래서 더 잘 기억한다”고.


노년의 시간에는 냄새가 있다.

그 냄새로 나를 과거로 이끌고,오늘을 감싸며,

앞으로 다가올 시간 앞에서 나를 겸허하게 만든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냄새의 언어로 세상을 다시 읽고 있다.

이것이 바로, 늙어가며 얻게 된 또 하나의 감각이다.


노년의 냄새의 기억은 우리 삶의 또 하나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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