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 시,그날의 시작. 병실 앞에서의 떨림.오늘도 당신 곁에서
사람의 인생에는 누구나 피하고 싶은 고비가 있다.
그 고비는 예고 없이, 마치 산길 모퉁이에서 갑자기 마주친 폭풍처럼 다가온다.
나와 아내의 삶에도 그런 날이 있었다.
아나운서로,PD로,사회를 향해 외쳤던 세월동안 내 곁을 묵묵히 지켜준 아내.
그녀와 함께한 지난 40년의 시간은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지난 1년,우리는 가장 깊고 차가운 강을 함께 건넜다.
그 강의 이름은 '암'이었다.
눈을 떴다.
새벽 3시10분. 평소 같으면 아직 꿈속일 시간이지만,어젯 밤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늘은 아내가 지난 1년간 암 치료를 마치고,
마지막 CT와 MRA 결과를 듣는 날.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여 잠은 일찍 달아나 버렸다.
커튼 틈으로 칠흑 같은 어둠이 스며 있었고,
북카페 창가에 서서 산 쪽을 바라보다가
'혹시 아내가 편히 잤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발끝으로 조심스레 방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이내 몸을 돌려 나왔다.
항암치료 이후 작은 스침에도 아파하던 아내를 더 깨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우리는 차를 몰고 괴산을 나섰다.
서울 아산병원까지는 약 두 시간 거리지만,
마음은 그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동안 큰딸에게서
카톡이 왔다.
"아빠,엄마 결과 어때요?"
아이들도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알았다.
진료실에 들어서니 아내와 의사의 얼굴에 동시에 번진 미소가 나를 맞았다.
"1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검사 결과,이상 없습니다. "
그 말 한마디가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순간차럼 느껴졌다.
대학1학년이던 스무 살의 아내,서른의 나.
그때 시작된 인연은 40년을 이어왔고,이제는 세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방송국에서 30년 넘게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들추며 달려온 나 대신,
아내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27년 동안 새벽을 깨우며 일터로 향했다.
그 손끝의 부드러움은 세월과 고생 속에
거칠어졌지만,그 속에 깃든 따뜻함은 더 깊어졌다.
그 힘으로, 아내는 죽기보다 힘들다는 표적항암치료를 14번이나 버텨냈다.
그 모든 시간을 지탱한 건 약도,주사도 아닌'사랑'이었다.
아내와 나는 퇴직 후 괴산에 정착했다.
논두렁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걸으며,흙 냄새와 들꽃 향기에 둘러싸여 살아간 지도 어느덧 14년.
우리는 단순히 '시골에 내려온 부부'가 아니라,누군가를 위해 손을 내미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 마음은 나를 장애인활동지원사로,아내는 노인돌봄맞춤센터의 사회복지사로 노인들을 돌봤다.
3년 가까이 70명이 넘는 실습생과 지적장애인을 돌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무는 법을 배웠다.
괴산으로 돌아오는 길,창 밖에는 한여름의 볕이 내리 꽂혔다.
작열하는 태양빛이 이마를 스치자, 문득 지난 1년의 장면들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병원 대기실에서의 긴 침묵, 주방에서 토스트를 굽던 아내의 뒷모습,
그리고 차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잠을 자던 당신.
아내가 다시 말한다.
"여보,나는 아무 걱정 안 했어.뭐든 오면 그냥 맞서면 되잖아."
나는 그 순간, 지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내게
짐을 지우지 않으려 했던 아내의 마음을 똑똑히 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텃밭 옆 평상에 나란히 앉았다.
바람이 불고,산이 숨 쉬고,하늘이 우리를 감쌌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당신 곁에서,당신의 그늘이 되어,남은 날을 다 걸어가겠습니다.죽어서도 당신 곁에 서 있는 나무로 남겠습니다.
아내는
암이라는 거센 바람을 견디고
다시 천천히 세상 밖으로 걸어나옵니다
친구를 만나고
작은 거리를 자동차로 다녀오고
괴산의 문화동아리에서
두 시간 내내 민요를 부릅니다.
소리를 내고,몸을 흔들며
아내는 삶을 다시 맞이합니다.
항암이 끝나는 여름,
뜨거운 8월이 오면
그녀의 여름도 끝이 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건강해 보이세요?”
하지만 나는 압니다.
그 건강한 웃음 뒤에
수없이 무너졌다 다시 일어난
그녀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아내는 뜨게질의 달인입니다.
매주 수요일이면 친구 집에가
작은 실로 삶을 엮어줍니다
그 손 끝에서 피어나는 온기는
언니와 친구의 마음도 녹입니다.
그리고 아내는 문득 말합니다.
“모든 고통도 결국은 지나가는 그림자일 뿐이야….”
그 말 앞에서
나는 오래도록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밝고 건강한 모습,
삶을 긍정으로 바라보는 눈빛
아내와 함께하는 사람들은
아내 앞에서 희망을 배웁니다.
우리는 연애 때부터
삶과 철학을 나누었습니다.
그 긴 대화의 시간들이
지금 아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아프면서도 말합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니…”
그 말 안에서
우리의 마음은 더 깊어지고
사랑은 다시 따뜻해집니다.
아내와 함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나에게는
이미 충분한 기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