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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항산에서 만난 사람들, 인생의 얼굴들

딸과의 여행, 그 산에서 나는 타인의 인생과 내 삶의 무게를 마주했다

by 최국만



그날, 태항산의 절벽 끝에서

나는 처음 본 사람들과

인생의 가장 깊은 골짜기를 이야기했다.


내 옆에는 딸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낯선 얼굴들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내 마음속 가장 어두운 방을 두드렸다.


“살다 보니… 다 힘들더라고요.”

그 말 한마디에,

모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는

회사를 정리하며 무너진 마음을 이야기했고,

누구는

이혼 후 아이를 혼자 키우는 삶의 버거움을 꺼냈다.

어느새 나도,

퇴직 후 느꼈던 쓸쓸함과

다시 쓰고 있는 삶의 의미를

조심스레 꺼내고 있었다.


우리는 처음 만났지만,

서로의 ‘고단한 진실’을 이해했다.


그곳은 절경이었지만,

나는 풍경보다 사람들의 얼굴이 더 깊게 남았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나를 찾고, 삶을 배운다.

취재차 해외를 다닐 때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나를 가장 사로잡은 것은 화려한 풍경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었다.

국적도, 언어도, 삶의 조건도 다르지만 낯선 땅에서 만난 이들은 금세 형님 같고 이웃집 아저씨처럼 다가왔다.

아마 이것이 여행이 주는 가장 묘한 선물이 아닐까.


퇴직 후 바쁘게 살아오느라 한동안 해외를 나설 여유가 없었는데, 큰딸이 중국 태함산 여행을 제안했다.

사실 해외 곳곳을 다녀왔지만, 이번 여행은 딸과 함께라는 점에서 특별했다.


태항산에 들어서자 눈앞은 이미 하나의 거대한 산수화였다.

봉우리마다 흰 구름이 감돌고, 기암괴석이 푸른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산길을 오르며 마주친 오래된 고찰은 세월의 풍상을 이겨낸 듯 고요했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는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딸과 함께 바라본 풍경은 잠시나마 세상의 근심을 잊게 했다.

그 순간, 나는 ‘이 길은 단순한 여행길이 아니라 내 삶을 다시 비추는 거울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여행 일행은 모두 12명이었다. 직업도, 살아온 길도 제각각 달랐다.

전직 군인도 있었고, 사업가도 있었다. 대부분 부부 동반이었지만, 나만 딸과 함께였다.

며칠이 지나자 자연스레 서로의 삶을 나누기 시작했다.

특히 담양에서 양계 사업을 한다는 이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현재는 대규모 사업을 일구었다고 했다.

그가 들려주는 도전과 실패, 그리고 다시 일어선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 권의 인생서였다.


“여행 와서 왜 그런 무거운 이야기를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낯선 길 위에서 만나는 타인의 이야기는 곧 내 삶을 비추는 또 다른 거울이 된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지난 삶을 다시 정리했고, 앞으로 걸어갈 길을 다시 생각했다.


헤어지면 끝날 줄 알았던 인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5박 6일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꾸준히 연락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삶이 건네준 소중한 선물이라고 믿는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내-존재”라고 했다.

우리는 세계 안에서 타인과 관계 맺음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태항산에서 만난 인연은 나에게 그 말을 다시 실감하게 했다.

여행의 진짜 목적지는 풍경이 아니라 사람이며,

그 만남 속에서 나는 조금 더 성숙해졌다.


오늘도 나는 그 여행길에서 마주한 풍경과 사람들을 떠올린다.

태항산의 구름 낀 봉우리와 고요한 절집, 그리고 따뜻한 대화.

결국 여행은 사라지는 시간이 아니라 내 안에 남아 새로운 길을 밝혀주는 불빛이다.

여행이란,

낯선 풍경을 보는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익숙한 자기 자신을 낯선 눈으로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날 태항산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게 세상 어떤 산보다 더 높고 깊은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름도, 직업도, 나이도 다 달랐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말을 나누고 있었다.


“살아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지금이, 참 고맙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타인과 함께 걷는 여행은,

결국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여정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듣고,

그 고통 앞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그 순간 우리는 단지 여행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내고 있는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딸과 함께한 이 여정 속에서

나는 세상을 향한 눈과

사람을 향한 마음이

조금 더 너그러워졌음을 느낀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건

같은 나라 말보다,

같은 인생의 고단함을 알고 있다는 연대감이다.


태항산의 바람은 잦아들었지만

그날 나눴던 말들은

내 마음속 깊은 협곡을

아직도 천천히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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