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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늙지 않는다

함께 늙어간다는 것의 기적

by 최국만


내가 아내를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봄 햇살이 부서지던 어느 대학 캠퍼스였다.

학생회관을 지나던 내 시선이

그녀의 눈빛에 잠시 머물렀던 그 순간—

그게 우리의 시작이었다.


그 후로 우리는 수많은 계절을 함께 건너왔다.

눈물로 젖은 날도 있었고,

웃음으로 세상을 이긴 날도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시간이 우리를 하나로 단단히 묶어 주었다.


젊은 날의 사랑은 불꽃같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 다투고 화해하면서

서로의 온도를 알아갔다.

그 시절엔 사랑이란 뜨거운 감정이었고,

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세상을 다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우리 머리 위로 흰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사랑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졌다.


이제 우리의 사랑은 조용한 온기,

묵묵한 배려,

그리고 서로의 침묵을 이해하는 평화가 되었다.


작년에 아내가 암 판정을 받았다.

그 순간 세상이 멈추는 듯했다.

수많은 사람의 아픔을 취재하며 살아왔지만,

정작 내 사람의 고통 앞에서는

나는 한없이 무력해졌다.


항암 치료가 시작되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밤새 구토에 시달리던 그 옆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괜찮다, 여보.

우린 이겨낼 거야.”

그 말만 되뇌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사랑이란 단어를 새롭게 배웠다.


사랑은 열정이 아니라 인내였다.

그리고 기다림이었다.

사랑은 ‘함께 울어주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확신했다.

사랑은 결코 늙지 않는다.


대학 시절의 사랑이 풋풋했다면,

이제 노년의 사랑은 은근과 끈기다.

젊을 땐 ‘당신이 필요해서 사랑했다면’,

지금은 ‘당신이 있어서 내가 산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젊은 사랑이 불이라면,

노년의 사랑은 등불이다.

꺼지지 않게 천천히,

조용히 타오르며 어둠을 밝혀준다.


사랑은 인간이 평생 풀지 못할 숙제다.

하지만 그 숙제를 함께 풀어갈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삶이 준 가장 큰 축복이다.


아내는 나의 동지이고,

내 인생의 절반을 함께 쓴 사람이다.

그녀의 웃음이 내 하루를 밝히고,

그녀의 손길이 내 마음의 주름을 펴준다.


이제 나는 안다.

사랑이란 ‘젊은 날의 감정’이 아니라,

‘늙어도 지켜야 할 약속’이라는 것을.


그녀가 내게 말없이 차를 건네고,

나는 그 차를 마시며 잠시 미소 짓는 순간,

그 속에 인생의 모든 의미가 있다.


사랑은 늙지 않는다.

다만 더 깊어지고, 간직할 뿐이다.


오늘도 나는 40년 전 그 옛날 캠퍼스의 봄을 떠올린다.

그때 내 앞을 지나던 한 여인,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앉아 있는 같은 사람.


세월은 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내 사랑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사랑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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