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 후 깨닫는 자연의 고마움과 그 속에서 삶의 휴식을 찾다
오늘도 나는 걷는다.
집에서 불과 10분만 걸어 나오면, 사방이 온통 숲이다. 앞산과 뒷산, 그리고 작고 낮은 능선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괴산은 그런 곳이다. 숲이 일상이고, 자연이 곧 나의 대화 상대가 된다.
나는 매일 아침 8km 남짓한 뚝방길을 걷는다.
그 길은 어느 이름 있는 숲길도 아니고, 누구의 추천 코스도 아니다. 그저 논두렁과 밭두렁 사이를 흐르는 작은 물줄기와, 야산의 울창한 나무들이 만들어준 길.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잊을 때가 있다. 사실, 나는 이 숲길을 걸을 때 ‘목적’이 없다. 단지 걷는다. 그게 전부다.
몽테뉴는 『팡세』에서 말했다.
“목적 없는 배는 그 어떤 바람도 불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늘 목적이 있는 삶을 강조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목적이 없는 걸음에도 가치는 있다. 오히려 그것이 진정한 ‘비움’의 사유일지도 모른다.
도시에서의 삶은 언제나 ‘목적 중심적’이었다.
방송 스케줄, 회의 시간, 마감일. 모든 하루는 목적과 목표 사이에 놓여 있었고, 늘 어디론가 향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잠시도 나 자신에게 질문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러나 지금 나는 걷는 데에 목적이 없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하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니 심신이 이완되고, 머릿속이 정화된다. 오히려 무목적 속에서 삶의 방향이 보인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세계-내-존재(Dasein)”다. 어딘가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그곳과 ‘공존’하는 것이다. 내가 걷는 숲길도 그런 공간이다.
어느 날, 칠보산을 오르다가 갑자기 비를 만났다.
우산도 없이 오르는 길, 하지만 숲은 나를 충분히 덮어주었다.
비가 나뭇잎을 두드리는 소리는 마치 고요한 산사에서 들려오는 스님의 목탁소리처럼 들렸다. 타닥, 타닥… 한 방울에 한 걸음. 그 일정한 리듬이 내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비 오는 숲은 그 자체로 하나의 철학이다.
고요하고, 절제되어 있고, 무엇보다 무위(無爲)의 지혜를 가르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되는 세계.
장자(莊子)가 말한 “소요유(逍遙遊)” — 무한한 자유 속에서의 자발적 유영. 나는 그 사유 속을 걷고 있는 셈이다.
숲은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를 평가하지 않고, 방향을 묻지 않으며, 단지 그 길을 허락해 준다.
이 숲길에서 나는 삶의 진짜 무게를 느끼고, 때로는 내려놓는다.
숲이 내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아무 목적 없이도 내가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깨달음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걷는다.
목적이 없기에 가벼운 걸음으로,
무위(無爲)의 사유와 함께,
비와 바람, 그리고 나뭇잎의 속삭임을 친구 삼아.
이 숲은, 나의 또 다른 철학서(哲學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