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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시작은 질문에서 온다

“나는 지금 누구로 살아가고 있는가”

by 최국만


늙는다는 건 서서히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다시 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이름이 사라지고, 직함이 없어지고,

세상이 내게 묻지 않을 때

비로소 나는 나에게 묻게 된다.


“너는 지금 누구로 살아가고 있느냐?”


젊은 날에는 세상이 늘 나를 불렀다.

기자였고, PD였고, 누군가의 남편이었고, 아버지였다.

‘최국만’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무언가의 앞에 놓여 있었다.

그 이름이 사회에서 불릴 때마다 나는 존재를 확인했다.


하지만 퇴직 이후, 그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줄어들자

낯선 정적이 찾아왔다.

일이 없다는 건 단순히 시간이 남는 게 아니라,

‘나의 쓸모’가 사라진 것 같은 공허함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일이 없으면 나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지?”

“내 존재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괴산으로 내려와 살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14년.

이곳의 아침은 조용하다.

산새 소리, 장독대 옆의 풀잎,

개들이 꼬리를 흔드는 소리까지 모두 하나의 ‘시간의 숨결’로 들린다.


그 속에서 나는 오래된 철학자들의 말을 떠올린다.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이다.”

그 말은, 늙어서도 여전히 생각하는 자에게 삶은 끝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몸은 늙어도, 사유는 늙지 않는다.


젊을 때의 나는 세상을 바꾸려 했고,

이제는 나 자신을 들여다본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는

노년이 되어 비로소 이해된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노년의 삶은 누군가를 따라가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나는 여전히 배우고 있고,

누군가를 돕고 있으며,

글을 쓰며 하루를 새롭게 채운다.


삶의 속도가 느려진 만큼,

사람을 보는 시선도 깊어졌다.

젊을 때는 세상의 정의를 찾았지만,

지금은 ‘내 안의 평화’를 찾고 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존엄하게 늙는다는 것은 결국,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일이다.’

누군가의 시선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 서서도 따뜻할 수 있는 사람.

그게 나이가 든 인간의 완성 아닐까.


존엄이란 남이 인정해 주는 품격이 아니라,

스스로를 존중하는 태도다.

남은 인생이 덜 번잡하고 덜 화려해도,

그 속에 나만의 진실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노년이란 결국 ‘존엄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세상이 나를 평가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비로소 스스로의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시간.


그것이 바로 존엄하게 늙는 법의 시작이다.


나는 오늘도 묻는다.

“나는 오늘 어떤 인간으로 남았는가?”

그리고 그 질문 덕분에,

나는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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