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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Sep 25. 2018

빛나지 않던 것들이 빛을 내도록 허락된 시간, 백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6)

 ‘백야’를 알기 전까지, 저에게 밤은 해가 져서 어두워진 때부터 다음 날 해가 떠서 밝아지기 전까지의 시간이었습니다. 어둠은 밤의 조건인 셈이어서 캄캄하지 않은 시간은 밤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러니까 밝은 밤, 백야는 저에게는 성립될 수 없는 우스운 말장난 같았습니다. 그것이 북극과 남극에 가까운 지역에서 실제 일어나는 자연현상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요. 백야를 알게 된 이래 백야는 저의 오랜 로망이었습니다. 이미 저물었어야 할 빛들이 머무는 밤이라니. 자신의 어둠을 빛에 양보한 밤이라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밤 중 가장 낭만적으로 느껴졌지요. 



 이번 여름 저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났습니다. 한국의 유례없는 폭염은 일상의 물기를 모두 앗아갔고, 건조한 삶에서 새로운 것이 잉태되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사랑했던 이와의 이별, 믿었던 이의 배신 등 사적인 시련이 겹쳐 저는 더욱 지쳐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유로운 휴양지 대신에 로망을 이룰 수 있는 도시로 날아갔던 것입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첫날밤, 잘 준비를 마치고 방 안의 불을 모두 꺼도 집 안은 환했습니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으로 백야의 빛이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빛의 채도는 이전에는 한번도 본적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침햇살의 반짝이는 투명함도, 한낮의 빛이 뿜는 강렬한 에너지도 없었습니다. 사라지기 직전까지 힘을 쥐어짜는 일몰의 열정도 없었습니다. 탁하고 메마른 빛. 모든 것이 타버리고 남은 재처럼 푸석한 빛. 세상을 덮고 있는 백야의 빛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저녁 9시 네바 강변을 걸었다. 백야의 끈질긴 빛을 화폭에 옮기려는 시도를 잠시 훔쳐볼 수 있었다.  





 11시가 넘은 시각, 고된 여행 일정으로 몸은 몹시 무거웠고 눈꺼풀이 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을 넘어 집 안으로 기어들어오는 빛의 동작은 힘겨워 보였습니다. 마치 저의 피곤한 신체 일부처럼 느껴지더군요. 동질감 같은 것이 었을까요. 저는 침대 대신 창문 턱에 기대어 앉았습니다. 창 밖 풍경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어슴프레한 빛의 안개가 세계를 뒤덮었습니다. 처음 체험해보는 몽롱함이었습니다. 지친 몸은 서서히 잠들어가고 있었지만, 사라지지 않은 빛의 마지막 줄기들은 아직 눈감기 이르다며 저를 붙잡고 있었죠. 몸이 체감하는 시간과 눈 앞에 보이는 세계의 시간은 너무나 달라 현실과 환상, 두 세계 사이의 문턱에 걸터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숙소 창 밖으로 보이던 단지 내 작은 정원. 밤 11시, 백야의 시간 안에서는 모든 풍경이 훤했다. 조금은 창백해보일 지라도. 


 페트르부르크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다 생을 마감한 도스토예프스키는 단편 <백야>를 남겼습니다. 백야의 주인공이자 몽상가인 청년은 여성 나스쩬까를 낯선 남자의 공격에서 구해주며 인연을 맺게 됩니다. 사랑에 빠진 그가 그녀에게 늘어놓는 달뜬 수다 중엔 이 도시의 백야에 대한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백야를 만날 수 있다면, 러시아 생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마주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만들었던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는 충만된 삶을 살고 있고 자신의 삶을 매순간 그때그때의 변덕에 따라 창조할 수 있는 예술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 동화 같은 환상적 세계는 그토록 수월하게, 자연스럽게 창조되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이 모든 것이 환영이 아닌듯합니다! 사실, 어떤 때는 이 삶 전체가 감정의 자극도, 신기루도, 공상의 기만도 아니고 정말로 현실에 존재하는 진정하고 본질적인 것이라 믿고 싶은 겁니다! (…) 어째서, 어째서 그런 순간이면 영혼이 죄어드는 느낌일까요? 어떤 마법에 걸린 듯, 어떤 알 수 없는 변덕에 취한 듯, 몽상가의 맥박이 빨라지고 눈에서 눈물이 샘솟고 눈물에 젖은 창백한 두 뺨이 달아오르고, 그의 존재 전체가 형언할 수 없는 환희로 가득 차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불면의 밤이 무한한 기쁨과 행복 속에서 찰나처럼 지나가고 새벽의 분홍빛 햇살이 온통 창문에 어른거릴 때, 우리 빼쩨르부르그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여명이 환상적인 아련한 빛으로 휑뎅그렁한 방을 비출 때, 우리의 몽상가가 지치고 기진맥진한 몸을 침대에 던지고는 병적으로 전율하는 영혼의 환희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심장에 지겹도록 달콤한 고통을 느끼며, 잠 속으로 빠져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그래요, 나스쩬까, 당신도 속아 넘어갈 겁니다. 남의 일이지만 그의 영혼을 뒤흔드는 것은 진정한, 진실된 정열이라고 믿게 될 겁니다. 그의 보이지 않는 꿈속에는 무언가 살아 있는 것, 손에 잡히는 것이 있다고 저도 모르게 믿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헛된 망상일까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중단편집 『백야 외』, 석영중 외 옮김, 열린책들, 2013, 256-257



 주인공이 설명하는 백야가 몽상가에 미치는 영향처럼, 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가 모든 몽상의 시원처럼 느껴졌습니다. 잠들지 못하는 짧은 밤들이 이어질 때, 백야의 아련한 빛은 우리 존재 안에 환상의 세계로 가는 길을 내어줍니다. 현실은 행복도 감동도 없는 ‘휑뎅그렁한 방’일지 모르나, 백야의 여명은 ‘환상적인 아련한 빛’으로 텅 빈 영혼의 방을 환희와 전율로 채워주는 것입니다. 비록 진정하고 진실된 정열이라고 믿게끔 하는 그 모든 것들이 ‘헛된 망상’일지라도요. 그러나 그 환상적인 신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황폐한 현실을 살아나갈 힘은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빛의 다발 안으로 손을 뻗어보았습니다. 이 파리한 빛이 시련의 긴긴 밤에서 저를 구원해주리라, 믿을 수 있었습니다. 



 재생목록의 곡 하나를 틉니다. 짙은(Zitten)의 ‘백야’입니다. 소중했던 이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며 ‘언젠가 시베리아횡단 야간열차를 타고 백야를 통과하자. 그때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다시 이 노래를 듣는 거야.’라고 말했던 적이 있죠. 비록 홀로 창문에 기대 듣는 노래일지라도 충분했습니다. ‘밤이 찾아와도 어둠이 내리지 않는’ 이 도시는 ‘꿈 같은 곳’이니까요. ‘모든 것이 아직 잠들지’ 않은 시간 속, 본래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던 ‘이 땅 모두가’ ‘꿈 같은 세계로 빛을 내고’ 있습니다. 기묘한 백야의 빛에서 우리 또한 빛의 일부 임을 자처해도 부끄러울 게 없습니다. 어쩌면 백야는 남은 빛들이 머무는 시간이 아니라 빛나지 않던 것들이 빛을 내도록 허락된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그 빛의 일부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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