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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Jul 16. 2019

‘나만의 기억'이 불가능해진다면?

블랙미러 시즌 1 <당신의 모든 순간>

*본글에는 <당신의 모든 순간> 에피소드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당 편을 온전히 즐기고 싶으시다면 먼저 시청을 한 후 이 리뷰를 읽기를 추천합니다! *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할 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건 불가능할 뿐 더러, 가지고있는 기억조차 정확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특히 기억의 대상이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특수한 경험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감정적 반응을 하고 경험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나’가 기억에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기억이 변형되는 요인은 너무나 많습니다. 당사자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면 실제보다 그 기억은 과장된 상태일 수 있죠. 반대로 당사자가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건이었다면 기억은 무성의하게 저장되어 있을 것입니다. 애초에 인간은 카메라처럼 세계를 그대로 복사하여 저장하고 끄집어내는 본체가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기억이란 행위 자체는 객관적일 수 없어요. 기억은 왜곡될 수 있다고 말하는 대신 우리는 기억의 본래 매커니즘이 왜곡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기억에 대한 담론은 기억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따지기보다 기억의 왜곡을 의미화하는 작업으로 이동해왔습니다. 증언을 생각해볼까요? 본래 증언은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진술을 의미했습니다. 법적인 효력을 갖기 위해서 증언되는 개인의 기억은 실제 사실과 일치해야 했죠. 그렇지 않은 기억은 채택되지 못하거나 심하게는 위증으로 처벌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증언이란 단어의 외연이 확장했습니다. 그리고 왜곡된 기억도 증언의 주요한 사례로 다뤄집니다. 개인이 사건을 다르게 기억하는 이유를 파악할 때, 당사자와 사건이 맺는 관계, 그리고 그 현재적 의미를 알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의 양상은 당사자의 태도나 인식,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일종의 우회로인 셈인거죠.




 그래서 제겐 블랙미러의 ‘기억’에 대한 에피소드가 무척 공포스러웠습니다. 블랙미러는 과학기술의 혁명이 가져옴 직한 근미래의 파국을 다룬 SF드라마입니다. 그중 시즌 1화의 <당신의 모든 순간>은 개인이 눈을 통해 본 모든 시각 정보를 영상으로 저장하는 칩을 몸에 탑재할 수 있게 되는 시대를 그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칩에 저장된 영상은 언제든지 되감아 재생하는 게 가능하며 타인들과 같이 볼 수 있는 상영 기능도 가능합니다. 불쾌하면 기억 일부를 지울 수도 있습니다. 더 이상 기억은 사적이고 내밀한, 의식의 일부가 아닙니다. 이 기술 안에서 기억은 과거로 치환되어 버리고, 개인의 과거는 안구라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그대로 포착되어 저장되며 그대로 복원이 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저장되고 공유되는 누군가의 과거는 기억의 매커니즘이 지워진 결과물입니다.




주인공 남자는 중요한 면접을 마치고 아내의 친구들이 모인 파티에 깜짝 방문합니다. 친구들은 면접 순간을 재생해보면 합격여부를 판단해주겠다며 짓궂게 장난을 칩니다.



아내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면접을 돌려보는 주인공.  손안에 작은 리모콘으로 언제든지 과거 영상을 불러올 수 있고 원한다면 지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의 칩에 저장된 과거를 돌려보는 것만으로 그 과거에 대해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렇게 단순하게 복사된 과거를 아는 것이 그 과거를 경험한 이에 대한 이해에 가치가 있는 일일까요? <기억>편의 남자 주인공은 아내의 과거를 돌려보다가 그녀가 사소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아내에 대한 의심은 커져가고 결국 그녀의 외도를 기억의 칩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과거의 시간들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기억의 칩들로 인해 인물들은 추락하고 맙니다. 이 에피소드가 기억에 대해 주는 함의는 다양합니다. 우리에게 사실 그대로의 사실, 그것이 가진 힘이 무시무시하다는 점은 말할 것 없죠. 그러나 우리의 기억이 특별한 것은 ‘내’가 개입된 ‘나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표현의 한계로 우리는 저마다의 기억을 타인에게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죠. 기억은 단편적인 풍경이 아니라 그때의 향기, 소리, 감촉, 나의 기분, 나의 상태, 나의 생각이 점철된 복합물입니다. 그래서 기억의 주인인 ‘나’가 제거된 기억은 사실상 빈껍데기 이겠죠.






파티때 아내와 한 남자의 분위기가 묘하다고 느껴 밤새 그들의 영상을 돌려본 주인공. 그녀는 물론 남자 집까지 찾아가 과거를 돌려보자며 도발합니다. 그는 이 둘의 외도를 확신합니다.
결국 그는 남자의 기억의 칩을 제거해버리는 무시무시한 폭력을 행사하죠. 그의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들은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당신의 모든 순간>은 기억의 본질을 간과해선 안된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누군가의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 복제하는 일은 더더욱 아니죠. 기억을 나눈다는 것은 그 기억의 주인인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억의 중요한 의의는 ‘나만의’ 기억을 함께 열어젖힘으로써 ‘우리’를 만들어 가는데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가장 내밀한 기억의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과도 갖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기억을 나누는 모습은 <당신의 모든 순간>처럼 TV채널을 돌리듯 누군가의 과거로 되감기아가는 게 아니라 불완전한 과거의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이어붙이며 말을 이어가는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모든 것을 잃고 혼자 남게 된 그. 공허한 눈빛으로 거울 속 자신을 응시하던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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